죽음 무릅쓰고 뛰어들어 구해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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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8면

지난 3일 낮 12시45분쯤 서울 을지로 7가 지하철 4호선 동대문운동장역.

시각장애인 최모(29.여)씨가 환승 계단 바로 옆 승강장으로 향하고 있었다. 충남 삽교에서 올라와 역 근처에서 친구를 만나기 위해 나선 길이었다. 그러나 앞을 보지 못하는 최씨는 발을 헛디뎌 1m60cm 아래 선로로 떨어졌다. 갈비뼈를 다쳐 움직이지 못하게 된 최씨는 "살려 달라"며 힘없이 외쳤다.

주변의 시민들은 "사람이 떨어졌다"고 웅성거릴 뿐 최씨를 구하기 위해 아무도 선뜻 나서지 않았다. 전동차가 승강장으로 들어올 시간은 점점 다가오고 있었다.

이때 명동의 거래처에 가기 위해 환승계단을 내려가던 황보인(38.자영업.사진)씨는 사람들 틈 사이로 최씨가 떨어져 있는 모습을 보게 됐다. 황보씨는 선로로 뛰어들었다. 몸집이 작은 최씨는 시민의 도움을 얻어 승강장 위로 대피시켰다.

하지만 막상 자신이 승강장으로 오르려는 순간 멀리서 전동차 소리가 들렸다. 세 차례 시도 끝에 겨우 승강장 위로 올라서자마자 전동차가 승강장에 진입했다. 황보씨는 "그땐 정말 무서웠다"고 말하면서도 "둘 다 무사해 다행"이라며 웃어보였다.

그는 119 구조대가 도착할 때까지 승강장에서 최씨 곁을 지켰다. 최씨 친구가 와 알려준 뒤에야 최씨가 앞을 못 본다는 것도 알게 됐다고 한다.

황보씨는 "안전 펜스도 없는 승강장이 시각장애인에게 얼마나 위험한지 알게 됐다"고 말했다. "지방에서 올라왔다는데 서울 지하철 역사의 점자 블록을 찾지 못해 서성이다가 떨어진 것 같다"는 것이다.

그는 "작은 섬유회사를 경영하는 평범한 아저씨"라고 자신을 소개했다.

소식을 듣고 상경한 최씨의 부모는 "양봉을 하고 있으니 꿀 한 단지라도 받아 달라"고 감사의 마음을 표시했고, 황보씨는 이를 받아들이기로 했다.

최씨는 이날 국립의료원에 잠시 입원한 뒤 기자들과의 접촉을 끊고 고향으로 소리없이 내려갔다. 경찰은 황보씨에게 '용감한 시민상'을 주기로 했다.

박성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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