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커버스토리] 금감위 어느새 '관료조직'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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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9면

금융감독위원회가 대통령에게 업무보고를 한 12일 오전 청와대. 이 자리에는 이근영 위원장과 금감위.금융감독원의 국장급 이상 간부들, 민간 자문위원 3명이 참석했다.

금감위의 공식 구성원인 비상임위원들은 이날 업무보고에 참석하지 않았다. 최고 의사결정기구인 위원회의 위원 가운데 공무원이 아닌 위원들만 빠진 것이다.

주변에선 당초 위원회 조직으로 설립한 금융감독위가 일반 관료조직으로 변질되고 있다는 상징적인 사례라고 지적했다. 금감위는 자리가 비좁아 비상임위원들은 청와대 업무보고에는 참석하지 않는다고 해명했다.

李위원장은 업무보고를 시작하기 전에 김대중(金大中)대통령에게 "금융감독기구 개편 문제를 둘러싸고 논란이 일어 송구스럽습니다" 고 말했다. 이에 대해 金대통령은 "경쟁력 있는 경제 체질을 만들고 국가경제를 발전시키는 근본은 금감위에서 나온다는 자부심을 갖고 일해 달라" 며 "금감위와 금융감독원은 조속히 화합하고 협력하라" 고 당부했다.

그러나 이날 업무보고에서 금감위와 금감원의 발전방안은 찾아볼 수 없었다. 지난주에 발표한 금융감독 체제 개편안이 금감위의 권한을 강화하는 쪽으로 나오자 금감원 직원들이 연대 사표를 제출한 소동에 대한 금감위원장의 사과뿐이었다.

◇ 감독체제 개편의 문제점〓국제통화기금(IMF)관리체제에 들어간 1998년 금융감독위원회와 금융감독원을 설립한 취지는 모든 금융기관을 함께 감독함으로써 효율을 높이고, 합의제 행정기구인 위원회 조직으로 만들어 독립성을 키우고 감독정책 수립과정을 투명하게 하자는 것이었다.

그러나 금감위 사무국이 갈수록 커지면서 위원회는 유명무실해지고, 일반 행정부나 다름없이 사무국의 공무원들이 좌지우지하는 상황이 됐다.

지난해 11월부터 다시 감독체제 개편안을 마련하는 과정에서 전문가들이 한결같이 지적했던 점도 위원회의 독립성을 강화해야 한다는 부분이었다.

그러나 금감위와 금감원을 통합해 중립적인 준정부기구로 만들자는 기획예산처의 안이 무시됐다. 또 금감원에 일부 남아 있던 증권.선물 관련 인허가 및 감독정책 수립 권한마저 금감위의 공무원 조직으로 넘어가게 됐다.

◇ 유명무실해질 위원회〓금감위 운영에 정통한 한 인사는 "이번 사태의 핵심은 관료들이 편법으로 공무원 조직을 확대하려 하고 있다는 데 있다" 고 강조했다. 그는 다음과 같이 주장했다.

"97년의 감독기구설치법 15조2항은 금감위의 예산.회계.의사 관리 기능 수행을 위한 최소한의 공무원을 설치하도록 규정, 금감위가 출범할 때만 해도 단순 행정보조조직에 불과했다. 그런데 99년 5월 감독기구설치법에 규정하고 있는 최소 공무원 설치 조항이 변칙적으로 삭제됐다.

국회 소관 상임위(정무위.재경위)에서의 논란 소지를 차단하기 위해 감독기구설치법을 직접 개정하는 대신 행정자치부 법인 정부조직법의 부칙을 통해 변칙 개정한 것이다. 한마디로 뒷문으로 슬며시 들어와 핵심적인 내용을 바꿔버린 것이다. "

이처럼 사무국이 커지자 위원회가 움츠러들고 있다. 한 관계자는 "금감위 공무원 조직에서 '서면결의' 를 하자는 요구가 늘고 있다" 며 "매주 금요일 회의가 열리는데1주일치 일도 예상하지 못하느냐" 고 지적했다.

역시 금감위 운영을 잘 아는 또 다른 인사는 "기본적으로 97년 금융감독 제도를 대수술했던 초심(初心)을 훼손해서는 안된다. 그러나 순수한 감독기구로 만들자는 당초 합의가 슬금슬금 훼손되고 있다.

물론 유능한 공무원들이 많고 공권력 행사를 민간인에게 맡길 수 없다는 얘기도 근거가 없지는 않다. 그러나 자꾸 금감위 공무원이 이런 식으로 늘어난다면 '금감위는 9명의 위원으로 구성된다' 는 법은 무슨 소용인가" 라고 지적했다.

◇ 금융감독위는 옛 재무부 이재국?〓98년 19명으로 출범한 금감위 조직이 커지면서 재경부 공무원들이 대거 금감위로 입성했다. 현재 금감위 사무국을 점령하고 있는 공무원들은 대부분 옛 재무부 이재국 출신들이다. 최근에는 아예 금감위와 재경부를 섞어서 인사 이동을 하는 것이 당연하게 여겨지고 있다.

◇ 금융감독원의 반발〓금융감독원 직원들은 이미 1천명 이상의 직원이 사표를 제출하는 등 강력 반발하고 있다. 감독기구의 독립성은 더 약해지고 공무원 조직만 키우는 감독체제 개편을 철회하라는 주장이다.

이에 대해 이근영 위원장은 "금감위가 생긴 지는 3년, 금감원은 2년밖에 안되는 만큼 현상을 유지하면서 운용의 묘를 기하겠다" 며 금감원 직원들을 달래고 있다. 당장 금감위 조직을 확대하지는 않겠다는 것이다.

정선구.서경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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