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삶과 문화

베니스에 세워진 '방의 도시'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지면보기

종합 30면

내 방문을 열면 가족들의 거실이 나타나고, 거실의 현관을 열면 마당이 펼쳐진다. 마당의 대문을 나서면 구불구불한 골목길의 전경이 반갑고, 골목을 따라가면 이발소며 철물점이며 동네 가게들이 즐비한 길이 나온다. 동네 길의 가장 바깥에 비로소 차들이 다니는 큰길이 나와, 학교며 백화점이며 도시가 전개된다.

한 사람의 방에서 출발하여 도시를 만나기까지는 이처럼 여러 겹의 껍질을 벗고 나와야 했고, 그만큼 길고 복잡한 의식을 치러야 했다. 그러나 이런 도시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도시의 한 건물을 들어가면 느닷없이 '소주방' '노래방' '전화방' 들이 나타난다. 붙어 있으면서도 서로 관련이 없다. 방에서 바로 도시로, 도시에서 바로 방으로 드나들 수 있는 간편한 공간뿐이다. 방과 도시 사이에는 거실도, 집도, 골목도, 마을도 사라져 버렸다.

전통적 도시를 뿌리에서 줄기를 거쳐 가지와 잎으로 퍼지는 나무의 모습에 비유한다면, 우리가 살고 있는 단절적이고 불연속한 도시는 뿌리에 곧바로 무수한 잎이 달려 있는 물풀과 같다. 파도가 치는 대로 흐느적거리고, 조류가 흐르는 대로 떠다닐 수밖에 없는 이런 도시를 '방의 도시'라 부르자.

베니스 영화제에서 김기덕 감독이 '빈집'으로 화려하게 감독상을 받던 그 순간, 베니스의 다른 한편에서는 한국의 또 다른 예술가들이 구슬땀을 흘리며 작품을 설치하고 있었다. 바로 다음날 제9회 베니스 건축비엔날레가 개막될 예정이고, 작품 마무리가 한창인 한국관의 출품 건축가 3명이었다.

올해 한국관은 매우 이색적인 전시를 계획했다. 선정된 몇 건축가들이 자신의 대표작품을 출품하고 말았던 예년과는 달리, 공동의 주제를 걸고 새롭게 창조한 작품들을 선보였다. 전시를 총괄한 커미셔너와 참여 건축가들은 한국의 도시와 건축적 상황을 '방의 도시'란 주제로 정의했고, 이런 도시에서 건축과 시민들이 처해 있는 상황을 치열한 분석을 통해 새롭게 조명했다. 그들은 방의 도시를 비판하지도 찬양하지도 않는다. 방의 도시가 현재 우리가 살고 있는 환경이라는 점을 직시하고, 세계의 많은 도시인이 처해 있는 보편적인 상황이라는 것을 담담하게 밝힐 뿐이다.

전시방법도 이색적이다. 건축전시회라면 전문적인 도면들과 실물 축소 모형 정도가 고작이지만, 올해의 한국관은 설치미술을 방불케 하는 작업들과 영상들로 가득하다. 개막식에는 어어부밴드의 공연까지 곁들여져 여러 나라 관객들의 주목을 독차지했다. 무엇보다 한국관의 깊이 있는 주제의식과 참신한 시각이 세계 건축계에서 높은 평가를 받았다. '방의 도시'가 서울이나 한국의 도시뿐만 아니라, 자신들의 문제임을 세계의 관객들이 공감한 것이다.

한국관의 건축가들은 그들만의 용어사전도 만들었는데, 예를 들어 '가든'을 "불고기와 냉면을 파는 식당으로서 주로 물레방아가 설치되어 있음"이라 정의한다. '노래방'은 "30분 있으면 아쉽고 90분 있으면 지겨운 곳"으로 재치 있게 설명하는가 하면, '방'이란 "도시에 흩어진 내 몸의 조각들"이라고 철학적인 정의도 내리고 있다. 이런 방들이 밀집돼 있는 '서울'은 "모두가 들어가 살려고 하는 곳인 동시에 모두가 탈출하려는 도시"일 수밖에 없다.

베니스 건축비엔날레는 올 11월 초까지 열리고, '방의 도시'는 세계 건축계를 향해 조용한 웅변을 계속할 것이다. 그 소리는 우리를 위한 위로인 동시에 경고다. 서울시민의 빈집을 채워주는 것은 도시의 방들이고, 김기덕의 '빈집'은 영화로 만든 '방의 도시'다. 올가을 베니스에는 2개의 같은 도시가 세워졌다. 비록 건축비엔날레보다 영화제가 훨씬 높은 국내적 관심을 끌었지만.

김봉렬 예술종합학교 교수.건축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