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론] '고-부 갈등' 미대선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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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6면

이번 미국 대선결과는 선거제도가 가지고 있는 많은 문제점들을 노정시키고 있다.

의사결정과정의 원칙들을 제대로 지키지 않은 채 유지돼 온 제도의 모순점들이 적나라하게 드러난 것이다.

첫째, 유권자 득표에서는 지고도 선거인단 득표에서 반수 이상을 획득하는 소수파 대통령이 나올 가능성이 크다.

도대체 이해할 수 없는 노릇이다. 주권자인 국민의 지지를 덜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대통령에 당선될 수 있다는 사실이 말이다.

가장 바람직한 의사결정방식은 참여자의 의사가 정확히 반영되는 방식이다. 그런데 미국 대선에서 택하고 있는 선거인단 방식은 유권자들의 의사를 왜곡시키게 마련이다.

역사적으로 선거인단 제도의 도입 자체가 민주적 발상에 근거한 것이 아니었다.

미국 건국자들이 국민들에게 투표권을 부여하면서 기존의 질서가 파괴될 것을 우려해 선거인단이라는 간접선출 방식을 택한 민주적이지 못한 의도의 산물이다.

*** 利害절충 산물 선거인단制

그동안 세번의 소수파 대통령이 선출되었음에도 불구하고 간접선거방식을 개정하지 않은 것은 전통을 중시하는 미국인들의 태도 때문이 아니다.

사실은 현재의 제도로 이득을 보는 주들이 많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미국의 큰 주들 11개를 합치면 선거인단이 2백60명이 넘는다.

큰 주들은 대선에서 자신들의 영향력이 크다는 것을 이용해 대선 후보들에게 많은 요구를 할 수 있는 이점이 있다.

반면 와이오밍이나 알래스카 같이 선거인단을 3명만 확보하고 있는 주들은 대선이 직접선거로 치러지는 경우 현재만큼의 비중도 갖지 못하게 된다.

따라서 그나마 선거인단 5백38명 가운데 3명의 선거인단이 배정된 것만으로도 만족해한다.

이처럼 선거의 기본원칙이 아닌 이해득실에 의해 운영되고 있는 것이 선거인단제도다.

태생적으로 민주주의 원칙에 배치되는 선거인단제도로 인해 50번 이상의 대선에서 소수파 대통령이 세번만 나타났다는 것이 오히려 신기하다.

*** 통합의 지혜 발휘해야

현재 초미의 관심은 플로리다 팜비치 카운티의 투표용지 시비일 것이다. 투표용지에 대한 기본 원칙은 가장 수준이 낮은 유권자도 자신의 의사를 쉽게 나타낼 수 있도록 만들어져야 한다.

유독 팜비치 카운티 만이 이 원칙에서 벗어났고 급기야 누구도 통제할 수 없는 상황을 만들어 낸 것이다.

그런데 이 투표용지는 공화당과 민주당의 관계자가 동의한 이후에 채택됐다는 점에서 형식논리로는 문제가 없다는 점에 주목하자. 재투표 주장이 나오고 있지만 그건 안될 말이다.

누구에게 투표권을 줄 것인가? 그 곳 유권자 모두인가 혹은 선거에 참여했던 사람들에게만 투표권을 줄 것인가? 고어에게 유리한 결과가 명확한 상황에서 재투표란 방식은 또 다른 문제를 야기할 따름이다.

미국 선거결과는 흥미의 단계를 넘어서 국론분열의 단계로 치닫고 있다. 1960년 대선에서 케네디는 닉슨 후보에게 0.2%보다 적은 표차로 승리하였다.

당시 닉슨은 선거결과에 불복할 수 있는 명분을 가지고 있었지만 승복했다.

그리고 8년 후 대통령으로 당선됐다. 역사로부터 지혜를 배울 수 있다. 공화당과 민주당은 적대적 동반자다. 지금 미국정치에서 필요한 것은 통합이다.

이번 개표 이후 두 후보간 갈등을 그들의 이름 앞자를 따서 고-부간의 갈등이라고 부르는 이가 있다. 참으로 절묘한 명칭이다.

이름뿐만 아니라 양자간의 관계에도 꼭 들어맞는 표현이다. 현명한 시어머니와 며느리는 끊을 수 없는 관계를 인정하고 갈등은 가족 모두에게 피해가 된다는 것을 알고 있기에 서로 양보하며 한 지붕 아래서 사는 지혜를 보인다.

선거는 이번으로 끝이 아니라 4년 후에 또 벌어진다. 미국 정치인들이 의식이 있다면 집권 못지 않게 중요한 것이 정치의 판을 깨지 말아야 한다는 책임감을 느낄 것이다.

만일 부시가 당선된다면 3당 후보인 네이더가 민주당의 지지표를 잠식한 덕을 본 것이다.

그런데 92년 선거에서 그의 아버지인 조지 부시 대통령은 제3의 후보인 로스 페로 때문에 패했다.

제3의 인물에 의한 덕을 보는 아들과 피해를 본 아버지라는 사실이 흥미롭다.

이현우(한국사회과학데이터센터 부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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