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시론

지금이 관치 논쟁 벌일 때인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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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9면

금융에는 기관 중심의 간접금융체제와 시장 중심의 직접금융체제가 있다. 은행은 이 가운데 간접금융체제에서 영업을 하는 금융기관이다. 은행은 예금자로부터 예금을 받아 자금을 조성한 후 이를 기업과 가계 등 자금을 필요로 하는 수요자들에게 공급하는 자금 배분 기능을 수행한다. 또한 은행은 지급결제를 통해 경제 안에서 돈의 흐름을 원활히 하는 역할을 한다. 이 두 가지 기능은 모두 공적인 기능이다. 은행은 법적으로 주주 소유의 사적 주식회사 성격을 지니지만 동시에 자금 배분 기능을 수행하고 지급결제를 담당하는 사회의 인프라라는 공적인 지위를 갖는 것이다. 은행이 유독 금융당국의 엄격한 감독을 받는 이유는 바로 이 공적인 기능과 지위 때문이다. ‘반도체감독원’이나 ‘휴대폰감독원’은 없어도 금융감독원이 있는 이유다.

최근 글로벌 금융위기를 겪은 이후 국제적으로 금융시스템의 재설계 논의와 작업이 활발하게 이뤄지고 있다. 금융시스템 개혁 논의 가운데 관심을 끄는 대목은 금융기관의 지배구조와 보상체계를 뜯어고치고 감독과 규제를 강화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크다는 점이다. 과거 금융기관의 방만한 행태가 금융위기를 초래한 원인 중 하나가 됐다는 지적이 많았기 때문이다. 금융기관 경영진에 대한 과도한 보상이 금융기관들로 하여금 지나친 위험 선호 행태를 불렀고 단기적인 이익에 집착하게 만들었다는 것이다. 이런 자각과 반성에 기초해 전 세계적으로 과도한 보상체계를 지양하려는 움직임이 가속화하고 있다. 일각에서는 이런 움직임이 자칫 과도한 규제로 이어지는 것은 아닌가 하는 걱정도 있다. 그러나 금융부실이 실물위기로 전염되는 바람에 많은 사람이 고통을 받은 데다 공적자금 투입 등 적지 않은 사회적 비용이 지출됐기 때문에 당분간 금융산업에 대한 규제 움직임은 지속될 것으로 보인다.

금융기관의 과거 행태 가운데 또 한 가지 짚고 넘어가야 할 대목이 사외이사를 주축으로 하는 은행이사회가 과연 제 기능을 다했는가라는 문제다. 사실 상당한 권한을 보유한 은행이사회가 제 역할을 다하지 못한다는 지적은 금융위기 이전부터 꾸준히 제기돼 왔다. 대형 은행의 경우 주식 소유가 분산돼 있어서 확실한 지배주주가 없다. 이런 상황에서 경영진과 사외이사가 서로 암묵적으로 협조할 경우 경영진이 장기간 재임하면서 많은 혜택을 누림과 동시에 잘못된 경영판단을 할 가능성이 커지게 된다. 경영진과 이사회 구성원 간에는 적절한 의사소통과 함께 적정 수준의 견제 관계도 존재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는 주주의 이익과 사회적 이익을 위해 은행이사회가 경영진을 효과적으로 견제해야 한다고 권고했다. 이에 따라 지난해부터 은행권 사외이사 제도 개선을 추진해온 정부는 최근 은행연합회의 자율규제 방식으로 은행 사외이사에 대한 모범규준을 발표했다. 사외이사의 총임기를 제한하고 사외이사들이 일정 시간 이상 이사 업무에 전념토록 책임을 강화하는 내용이다.

은행은 사적 이익 추구와 공적 기능을 동시에 수행하는 경제의 핵심 조직이다. 글로벌 금융위기 와중에서 정부가 은행 외화 부문에 대한 지급보증 등의 조치를 취한 것도 이 때문이다. 정부는 은행의 공적 기능을 염두에 두고 취한 조치이지만 결과적으로 은행들은 사적 이익을 늘리는 데 큰 덕을 봤다. 사정이 이런데도 위기 때 지원은 당연하고, 평상시 은행에 대한 감독과 조치는 ‘관치’라고 비난하는 것은 적절치 않다. 더구나 아직은 글로벌 금융위기가 완전히 극복되지도 않았고, 새로운 해외발 위기의 조짐이 가신 것도 아니다. 위기 극복에는 은행의 공적 역할이 중요하다. 은행이 잘못되면 국가경제가 무너질 수도 있는 상황에서 정부와 은행 간에는 긴밀한 의사 소통과 공조의 필요성이 크다. 이를 위해 은행의 다양한 인적 네트워크와 제도를 정비하는 것은 매우 긴요하다. 이를 두고 무작정 ‘관치’라는 딱지를 붙여 폄훼하기에는 우리가 처한 상황이 그리 녹록지 않다. 지금은 관치 논란을 벌이기보다는 위기 극복과 예방을 위해 바람직한 은행의 역할을 모색하고, 정부와 은행 간의 관계를 재정립하기 위한 생산적인 논의가 필요한 시점이다.

윤창현 서울시립대 경영학부 교수  바른사회시민회의 사무총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