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앙시평] 메달이 뭐길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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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7면

시드니 올림픽 17일간의 일정을 모두 마친 지난 1일 마라톤 경기에서 꼴찌에서 둘째로 완주하고 쓰러진 캄보디아 선수의 일그러진 얼굴이 승자의 기쁜 미소 뒤에 가려진 많은 패자의 비통함을 극적으로 대변했다.

메달이 뭐길래 저 환희, 저 통한일까. 국제올림픽위원회(IOC)는 국가별 메달 집계 공식화를 부정하지만, 대중매체는 금메달 우선 합계방식과 총 메달 합계방식을 쓰고 있다.

어느 방식으로나 미국.러시아.중국은 상위 순위에 변함이 없지만, 한국은 금메달 우선 순위로 12위, 총 메달 합계로 공동 9위를 차지한 셈이다. 이 순위가 무엇을 의미하는가.

4년간 자신과 싸우면서 남모르게 땀과 눈물을 흘려온 선수 개인에게 보상의 뜻을 담고 있는 올림픽 메달을 어느 나라나 국민적 우열을 가리는 전리품으로 여긴다.

국가통제 전통이 남아 있는 나라들이 스포츠를 국책사업으로 육성해 국력에 비해 많은 메달을 따고 있다.

쿠바가 그런 나라다. 반면 일본은 인구와 경제력에 비해 저조했다. 한국의 순위는 경제력으로는 대등하고 인구로는 다소 과분하지만 그나마 정부 지원이 있었기에 얻을 수 있는 메달 수확이었다.

스포츠 승패에는 천재 선수 등 돌출 변수가 작용한다. 그러나 몬트리올 올림픽에서 첫 금메달 따기 전후 사정으로 미뤄 스포츠는 경제력.정부지원. 국민 성원 등을 뭉뚱그린 국력과 전혀 무관하지 않다는 느낌을 갖게 된다.

다시 말해 메달 획득 수가 어느 정도까지 국력에 비례한다. 해마다 보릿고개를 겪던 시절 스포츠에서도 메달 가뭄을 겪지 않았던가.

국민소득 수준이 오르면서 '헝그리' 정신의 스포츠 열기는 식고 선진국형 스포츠 인기가 달아오른다. 시드니 올림픽은 한국이 그 전환기에 있음을 보였다.

시드니 대회의 낙수 하나는 변화된 남북관계의 표출이다. 남북한 선수단의 동시 입장, 관중의 협조 응원 등이 그것이다.

여기서 중요한 사실 두 가지에 주목하게 된다. 첫째, 입장선수를 잘라 북쪽 인원에 맞추고 관중 응원의 힘을 몰아주는 등 남쪽의 베품이 일방적이었다. 둘째 "우리의 소원은 통일" 을 외친 응원에도 북한은 금메달 우선 순위 60, 총 메달 순위 42위에 그쳤다. 합쳐봐도 남한 순위에 도움이 되지 못한다.

이는 중요한 의미를 함축한다. 군사력을 제외하면 현재 북한의 국력은 극히 피폐하다. 대북(對北) 경협사업에서 얻을 것보다 줄 것이 많다.

북한의 밑빠진 독은 남한의 경제적 기력을 쇠진시킬 수 있다. 북한이 사회주의 통제와 군비강화의 고삐를 풀어 체제 밑바닥의 틈새 구멍을 메운다는 전제조건이 충족된 다음에야 대북 지원이 북한 주민 경제.복지 향상과 남한 기업 생산비 절감이라는 실효를 거둘 수 있다.

의미있는 또 하나의 낙수는 도핑검사 강화로 약물 복용을 의심받은 선수들의 대거 탈락이다. 중국은 육상선수들을 아예 출전금지 조치했고, 루마니아 미모의 체조선수는 금메달 하나를 박탈당했다. 꾸준한 노력의 자연스런 결실로 얻는 메달이 진정한 가치를 가진다.

메달에도 한계효용 체감법칙이 작용한다. 첫 메달이 가장 값지고 획득 수가 늘면 그 가치가 낮아 보인다. 국제산업기능공 대회에서 우리의 메달 욕구는 이미 충족된 듯 요즘에는 대회 개최 여부도 보도되지 않는다.

한국인이 욕구충족의 첫 술도 못 뜬 분야가 노벨상 수상이다. 학문분야의 수상은 아직 꿈이지만 문학과 평화부문을 생각해봄 직하다고 한다.

제임스 조이스.어니스트 헤밍웨이.테레사 수녀.넬슨 만델라 등 수상자들은 삶 자체가 문학과 박애정신의 발로였다. 그들이 노벨상을 의식해 삶을 영위한 흔적이 없다.

삶을 진솔하게 살다보면 자연스레 메달이 따라왔다. 열심히 뛴 선수라면 메달 없이도 박수받듯이 진솔한 인생을 살아가는 사람은 누구나 진정한 메달감이다. 이러한 국민이 모인 국가가 진정한 일등국가다.

김병주 <서강대 교수.경제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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