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OOK 깊이읽기] 일본 근대화의 영웅 된 시골 검객, 료마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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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6면

사카모토 료마 평전
마쓰우라 레이 지음
황선종 옮김, 더숲
325쪽, 1만4900원

사카모토 료마는 1835년 태어나 1867년 죽었다. 32년의 짧은 생애. 불꽃처럼 살다가 자객의 칼에 맞아 비극적으로 갔다. 일본인들은 그를 전국시대의 영웅 오다 노부나가, 통일을 완성한 도쿠가와 이에야스와 같은 반열에 놓고 존경한다. 믿기 힘들 정도로 뛰어난 협상력과 돌파력·설득력을 발휘한 풍운아이기 때문이다. 그의 삶을 사실적으로 다룬 이 책은 권위있는 이와나미(岩波)서점에서 지난해 나왔다. 저자 마쓰우라 레이는 일본 근대사에 관해 다수의 책을 쓴 78세의 노학자다. 각종 사료와 일기·편지를 치밀하게 분석, 대조해 평전을 썼기 때문에 보통의 한국인 독자에게는 어렵게 느껴질 수 있다. 『료마가 간다』 같은 소설이나 일본 근대사 개설서의 다음 코스라 할까.

사카모토가 살던 일본은 안팎으로 심각한 위기상황이었다. 태어나기 직전 대기근(1832~33년)이 들어 민심이 흉흉했고, 서양 세력이 무력을 앞세우며 개항하라고 을러대곤 했다. 게다가 도쿠가와 막부는 지방(번)의 영주들에 대한 통제력을 잃어가고 있었다. 이 와중에 1858년 굴욕적인 미·일 수호통상조약이 체결됐다. 최신식 서양군함(黑船)을 타고 들이닥친 미국 페리 제독의 협박 때문이었다. 당연히 국내 정치에도 파열음이 나기 시작했다.

자객에게 암살당하기 직전인 1867년 하숙집에서 한가한 때를 보내고 있는 료마. [사진제공=더숲]

도사 번(지금의 고치현 일부) 하급무사의 아들로 태어난 사카모토 료마는 소년 시절 검술에 전념했다. 그가 12세 때 병사한 생모 대신 들어온 계모도 나기카타(長刀)라는 무기의 달인이었다. 지방 도장에서 검을 익힌 뒤 교토로 상경해 더 깊은 수련을 쌓았다. 당시 그는 “서양인의 목을 베어 돌아오겠다”고 말하곤 했다. 왕정을 회복하고 서양세력을 물리치자는 존왕양이(尊王攘夷) 사상에 젖어 있었던 것이다. 1859년에는 대포 쏘는 기술도 배우기 시작했다. 그러던 그가 1862년 일대 전환기를 맞는다. 일본 근대 해군의 아버지이자 일본인 최초로 태평양을 배로 건너 미국에 다녀 온 대정치가 가쓰 가이슈(1823~99)를 만난 것이다. ‘여차하면 베어버릴 생각으로’ 집에까지 찾아갔다가 서양식 근대화와 해군력의 필요성을 역설하는 가쓰에게 매료돼 선뜻 그의 문하생이 되었다.

이 때부터 죽기 전 5년이 절정기다. 막부에 대항하기 위해 사쓰마 번(지금의 가고시마현 서반부)과 조슈 번(지금의 야마구치현 서북부)이 손을 잡은 ‘삿초동맹’, 일본 근대사의 일대 전환점에 해당하는 대정봉환(천황에게 국가 통치권을 돌려준 조치)을 성사시킨 게 대표적이다. 그는 해원대(海援隊)라는 사설해군 겸 무역회사를 경영했고, 홋카이도 개척에 열을 올리기도 했다. 정치가이면서 군인·상인 기질도 갖고 있었던 셈이다. 그러다 1867년 11월15일 막부 측 순찰대원들의 기습을 받아 짧은 생을 마감하고 만다.

우리 입장에서 당시의 조선에선 어떤 일들이 벌어졌는지 되돌아보지 않을 수 없다. 천주교도를 박해한 기해사옥(1839년)이 일어났고 동학운동이 탄압받았으며, 흥선대원군이 실권을 장악(1863년)해 앞뒤 꽉 막힌 쇄국책을 강요하던 때였다. 이런 차이가 수십년 후 나라를 먹고 먹히는 상반된 처지를 낳았다.

노재현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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