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설] 병역수사 '정치권'은 빠져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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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2면

병무 비리 수사가 정치권에 때아닌 파문과 갈등을 부르고 있다.

지금이 수사의 적기(適期)가 아니라거나 총선 후로 수사를 미루자는 뜻이 아니다.

병역의무 같이 헌법이 규정한 기본 의무이면서 지대한 국민적 관심이 깔린 분야의 비리 수사는 대상자 지위의 높낮이나 정치적 입장 여하를 떠나 상시적이고 일상적으로 이뤄져야 마땅한데 왜 지금 불쑥 터져나오느냐는 의문이다.

그것도 군 수사기관이나 검찰 같은 수사당국이 아닌 정치권에서 먼저 입을 열었으니 '오해' 가 일파만파로 번지게 됐다.

병무 비리는 지난해 국방부가 여러 차례에 걸쳐 수사를 벌이고도 모자라 연말에 국방부 감사관실이 나서 수사과정 전반을 점검하기까지 했던 사안이다.

물론 그마저 사회 지도층이나 군 간부 관련 여부를 철저히 파헤치지 못했다는 의혹이 여전히 남아 있었던 만큼 시민단체가 들고일어선 것을 기화로 제대로 짚어보겠다는 데 이견이 있을 리 없다.

문제는 그 방식과 시점.거론 대상에 있다.

김대중(金大中)대통령은 그제 새천년 민주당 총재 취임사를 통해 "고질적인 악습인 병역 기피를 뿌리뽑고 있는 중" 이라며 "병역 의무를 기피하고 명예롭게 살아갈 수 없게 하겠다" 고 천명했다.

청와대 대변인은 이에 대해 어제 "부정부패 척결 차원에서 병무 비리를 예로 든 것이며, 정치인을 목표로 수사하고 있지는 않다" 고 해명했지만 아무래도 개운치 않다.

오비이락(烏飛梨落)인지 총재 취임사가 나오자 병무 비리 수사가 말을 맞춘 듯 뒤를 잇고 있다.

안 그래도 검찰 고위 간부들이 잇따라 청와대에 입성하면서 총선을 앞둔 정치권 사정설이 나돌던 판이라 특히 야권의 걱정과 의심을 불러일으키기에 족하다고 본다.

대통령의 뒤를 이어 '여권 관계자' 나 '사정 당국자' 들이 정치인 병무 비리 연루 가능성을 흘리고, 검찰은 어제 "혐의자 명단을 넘겨받아 수사 중" 이라고 밝혔다.

게다가 청와대측이 수사 주체라고 밝힌 국방부는 정작 "병무 비리 의혹을 제기한 시민단체에 관련 자료를 보내달라고 요청해 놓은 상태" 라고 당황해 하는 기색이니 도대체 권력 핵심 깊숙한 어디쯤에서 이 일이 진행되고 있는지 알수 없다.

수사 주체가 검찰인지, 시민단체인지 그마저 헷갈리고 있다.

병무 비리 수사는 연중 내내, 그리고 대상도 무차별적으로 행해져야 옳지만 혹시라도 정치권이 이를 정파(政派)적 시각으로 이용하려 해선 안된다.

지금 총선 정국이 정책대결 아닌 선거법 논란.안보 서신 시비 같은 곁가지에서 맴돌고 있는데 병무 비리까지 가세하면 바닥없는 진흙탕으로 빠져버릴 위험이 크다.

병무 비리 수사는 수사당국에 맡기고 정치권, 특히 여권은 관심을 거두는 게 옳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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