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앙포커스] 21세기 한·미관계의 조건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7면

역사의 아픈 페이지가 미래를 위한 값진 초석이 될 수 있다면 그 희생은 숭고한 것이 될 수 있다. 노근리사건을 다룸에 있어 우리 사회가 격정이 아닌 이성으로 문제를 풀어가고 있음은 이제 우리 사회가 한결 성숙해졌음을 말해준다.

앞으로 명확한 진상조사가 한.미 당국에 의해 투명성 있게 이뤄지고 그 이후의 처리과정도 합리적이 돼야 하겠지만 그것이 진정한 한.미관계의 발전으로 이어지는 한 그 절절한 아픔은 차원이 다르게 승화될 수 있을 것이다.

차제에 우리는 과연 우리에게 한.미관계란 무엇인가, 그리고 21세기를 목전에 두고 한.미관계를 미래에도 지속적으로 발전시켜야 할 이유란 무엇인가에 대해 다시 한번 생각해 보지 않을 수 없다. 결론부터 얘기하면 다섯 가지의 이유가 있다.

첫째, 지난 50여년의 역사적 관계다. 이러한 관계에서 한국은 분명 수혜국이며 이것은 우리에게 실질적.정신적 부담으로 남아 있다. 그러나 물론 좋은 관계발전이라는 점에서는 자산이 된다.

둘째, 한반도의 전략적 안정을 위해 미국은 반드시 필요한 존재다.

셋째, 미래의 한반도 통일을 위해서다. 평화와 안정을 바탕으로 통일을 이뤄나가겠지만 주변국, 특히 미국의 지지를 필요로 한다.

넷째, 미국은 한국의 지속적 경제발전의 파트너다.

다섯째, 민주주의 체제에 기반을 둔 동반자다. 각 요인들의 중요성의 증감은 다소 있겠으나 이 다섯 가지는 21세기에도 건강한 한.미관계를 이뤄야 할 중심요인으로 남을 것이다.

한국으로 볼 때 미국의 가치는 미국이 외교정책에 있어 한반도에서 뿐만 아니라 동아시아에서 지금의 국제주의를 고수하는 한, 그리고 중상주의적 경제정책으로 돌아서지 않는 한 지속될 것이다.

미국에 한국의 가치는 앞으로 한국이 민주주의와 시장경제를 더욱 발전시켜 갈수록 커질 것이다. 물론 한국이 지속적으로 국제사회에 대해 책임있는 역할을 할 수 있어야 한다는 전제가 있다.

이러한 다섯 가지 요인을 충족시킬 수 있는 국가에서 미국을 떼어놓고 생각할 수 없다는데서 한국의 국제정치적 미래에 있어 한.미관계의 중요성을 말해준다. 그렇다면 한국이 미래에 어떠한 전략적 방향으로 나가야 하는가에 대해서도 하나의 해답을 얻을 수 있게 된다.

즉, 일부에서 얘기하는 미국을 대신하는 중국대안론은 당분간은 적어도 시기상조다. 한국이 중국과 전략적 파트너십을 다져가는 것은 좋지만 위의 다섯 가지의 요인에 비견될 만한 관계가 되기에는 여전히 많은 시간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또한 앞으로 전개될 지 모르는 미.북관계의 변화에 대해서도 중요한 함의(含意)가 있다. 한.미관계가 미래에도 이러한 기본적 요인을 바탕으로 전개될 수 있다고 확신만 할 수 있다면 미.북관계의 개선도 한.미관계의 이런 틀 속에서 용해될 수 있다.

이러한 비전을 어떻게 공고히 하느냐. 21세기는 국제환경뿐 아니라 양국의 국내사회도 급격히 변할 것이다. 무엇보다도 두 가지, 양국 내의 사회적 동의와 정책 당국자간의 문제해결 능력이 중요하다.

국가관계 발전에 있어서 생겨나는 문제에 대해 정책 당국자간의 해결방식에 대한 상호 교감의 합의가 있어야 한다.

문제에의 즉각적 대처, 문제 접근에 있어서의 진지함, 정책과정의 투명성, 그리고 정책대안의 합리성 등이 바로 그것이다.

이에 못지 않게 중요한 요인이 바로 사회적 동의다. 미국은 이미 오래 전부터 다원적 민주주의 사회로 발전해 왔다. 한국도 이제 민주화의 결실로 다원적 사회로 급속히 변하고 있다.

그리고 외교정책에 있어서도 어느덧 사회적 동의를 필요로 하고 있다. 따라서 미래의 한.미관계도 양국의 사회적 동의를 바탕으로 발전돼 나가지 않으면 안되게 돼 있다.

노근리사건이 한.미관계에 주는 중요성도 그 사건 자체의 심각성뿐만 아니라 그것이 미래의 한.미관계에 주는 그와 같은 함의 때문이다.

그리고 지금의 몇몇 한.미관계의 미시적 현안들이 그런 경우에 속한다. 미국이 진정으로 한.미관계의 발전을 생각한다면, 예컨대 한.미주둔군지위협정(SOFA)의 개정 등에 좀 더 전향적으로 나서줘야 하는 것이 바로 그러한 점 때문이다.

돌다리도 두드려서 건너라는 아주 평범한 진리를 되새기며 큰 그림을 위해서 한.미관계를 받치는 작은 기둥 하나도 잘 건사하는 조심성이 21세기의 건강한 한.미관계를 만든다.

현인택<고려대교수.정치학>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