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대한 외계 지성과 만난 불완전한 인간들

중앙선데이

입력

지면보기

135호 05면

심리학자 켈빈은 행성 ‘솔라리스’의 상공에 떠 있는 연구 스테이션으로 부임해 온다. 행성을 에워싸고 있는 점액성 바다는 하나의 생명체다. 행성의 궤도를 안정적으로 유지하는 능력을 갖춘 이 생명체의 표면에서는 갖가지 이미지가 나타났다 스러지는 장관이 연출된다. 그러나 이 지성체는 인류의 거듭된 접촉 시도에도 130년이 지나도록 무관심으로 일관하고 있다. 한때 수많은 연구자를 끌어들이며 융성했던 솔라리스학(學)도 지금은 쇠퇴기를 맞이했다.

조현욱 교수의 장르문학 산책-『솔라리스』스타니스와프 렘 지음, 김상훈 옮김, 오멜라스 펴냄

스테이션에 도착한 켈빈은 연구원 한 명이 자살했다는 소식을 듣는다. 그리고 10년 전에 죽은 아내 레야를 빼닮은 ‘방문자’가 자신을 찾아오자 감정적 혼란에 빠지게 된다. 연구원 모두가 동일한 현상을 겪고 있었다. 외계 지성이 인간의 기억을 투사해 현실적 물체를 만들어내는 것이다.

폴란드 작가 스타니스와프 렘(1921~2006)의 『솔라리스』(1961)는 두 가지 축을 중심으로 진행된다. 하나의 축은 사랑이다. “어둠 속에서 그녀의 부드러운 어깨를 감싸 안은 나는 그녀의 몸이 떨리는 것을 느꼈고, 그녀가 정말 레야라고 믿었다. 아니, 그 순간 나는 그녀가 나를 속이고 있는 것이 아니라 나 자신이 그녀를 속이려 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녀는 자신이 레야라는 사실을 전혀 의심치 않고 있었으니까.”

그 사랑은 필사적이다. 그녀는 뒤늦게 진상을 깨닫고 절망에 빠진다. “당신은 나를 레야라고 부르지만… 내가 당신이 예전에 사랑했던 여자가 아니라는 걸 나는 알아요.”하지만 남자는 그녀를 다시 잃을 수는 없었다. “그래. 그건 사실이야. 그렇지만 당신은 지금 여기 내 앞에 있어.”

또 하나의 축은 외계 지성과의 접촉 문제다. 인간의 인식으로는 끝내 이해할 수 없는 것일지 모른다는 회의론을 담고 있다. 책의 상당 부분은 소위 솔라리스학(學)의 방대한 연구 내용과 다양한 이론을 소개하는 데 할당된다. 하지만 과학적으로 인과관계나 이해방식을 제시할 수 있는 것은 하나도 없다. 비교적 유력하게 제시된 해석이 ‘신(神)적 지성의 유아기적 발달 상태’라는 것이니 알 만하다. 인간 중심적인, 이성적 인과관계를 틀로 삼는 인식 방법의 한계를 지적하려는 것이 저자의 의도로 분석된다.

렘의 작품들은 41개국 언어로 번역돼 3000만 부 이상 팔렸다고 한다. 그 대표작으로 꼽히는 게 바로 『솔라리스』다. 초판이 나왔을 때의 평은 “상업문학 일변도의 미국 과학소설에 맞서 인류 문명의 오만을 풍자하는 철학적 작품”이라는 것이었다. 거장 안드레이 타르코프스키 감독과 천재 스티븐 소더버그 감독에 의해 각각 영화로 제작돼 더욱 유명해졌다. 전자는 철학적이어서 좀 지루하고 후자는 멜로에 치중했다는 게 세간의 평이다. 두 영화와 소설은 결말이 각각 전혀 다르다. 책은 SF 전문 출판사로 지난해 출범한 ‘오멜라스’에서 펴냈다. SF 전문 기획번역가 김상훈씨의 번역이라 믿을 만하다.


조현욱 한국외국어대 언론정보학부 초빙교수. 중앙일보에서 문화부장과 문화담당 논설위원을 지냈다. 무협소설과 SF 같은 장르문학을 좋아한다.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