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려면 제대로 하라. 지금처럼 규제의 곁가지만 친다면 달라질 게 없다. " 규제개혁 현장에서 들려오는 기업인들의 목소리는 이렇게 요약된다.
이들은 정부가 기업경쟁력 강화를 위해 개별 규제를 많이 푼 것에 대해선 후한 점수를 준다.
그러나 정부가 전체적인 기업경영활동에 대한 고려나 핵심규제의 개혁에는 상대적으로 소홀했다고 평가한다.
◇ 공무원의 규제.간섭 = 공무원들의 은밀한 규제와 간섭도 기업활동을 옥죄는 주범이 되고 있다.
수입의료기 업체인 M상사의 유모 (43) 사장은 최근 요실금 치료기를 수입하려다 뜻밖의 규제에 부닥쳤다.
이 치료기는 이미 2년 전부터 식품의약품안전청.한국생산기술연구원.한국생활용품시험연구원 등의 시험을 거쳐 식약청으로부터 '수입품목 허가' 를 받은 제품. 그런데 식약청은 같은 회사로부터 동일한 제품을 수입하는 데도 같은 제품이란 것을 인정할 수 없다고 했다.
처음부터 다시 식약청에 서류를 제출하고 각 연구원의 시험을 거쳐 수입품목 허가를 받으라는 것. 처리기간만도 최소 5개월이 걸릴 전망.
◇ 법규 소급적용 = 주택업체인 A사는 올초 최근 준공한 7백8가구의 아파트에 수돗물을 공급하기 위해 경기도 이천시청을 찾았다.
그러나 시측은 "한 가구당 1백70만원씩 모두 12억4천만원을 내야 물을 공급하겠다" 고 말했다.
지난해 3월 '상수원 수혜자는 가구당 1백70만원의 분담금을 내야 한다' 는 조례를 만들었다는 설명과 함께. A사 관계자들이 "무슨 소리냐, 사업승인이나 분양신청때도 이런 규정이 없었는데 소급적용하면 어떻게 하느냐" 고 반발했지만 소용없었다.
급수공사가 지연되면 입주시기가 늦춰져 입주자들에게 입주지체보상금을 내야 하기 때문에 할 수 없이 전체 분담금 가운데 30%인 3억7천만원을 먼저 내고 나머지는 준공때 내겠다고 약속했다.
이천시는 뒤늦은 7월 15일에서야 "분담금 부과를 취소한다.이미 거뒀던 돈도 예산에 반영해 돌려주겠다" 고 통보해 왔다고 한다.
◇ 없어진 규제 강요 = 최근 H사 관계자들은 수도권 아파트의 분양승인을 받기 위해 경기도의 한 지자체를 찾았다가 말문이 막혔다.
담당자가 '분양가 산출내역서' 를 내라고 요구한 것. 아파트 분양가 자율화가 이뤄졌기 때문에 전혀 필요없는 서류라고 알려줬으나 막무가내였다.
담당 공무원은 제출의무가 사라진 이 문서를 끝까지 요구했고 결국 끼워맞추기식으로 분양가 산출내역서를 만들어 냈다.
이 과정을 거치며 담당 공무원은 통상 30분이면 가능한 분양승인서를 규정상 처리기간 5일을 다 채우고서야 내줬다.
◇ 규제만능주의 = 올해부터 시행된 투자신탁업법상의 '투신운용 전문인력' 제도가 대표적 사례. 투신사를 설립하려면 반드시 있어야 할 전문인력 자격요건이 너무 까다로워 은행 등 상당수 금융기관의 전문가들도 자격요건을 갖추기가 어렵다.
그러나 응시 자격요건 중에는 투신협회에서 6주간의 교육만 받으면 되는 규정도 있어 두번에 걸친 이 시험의 통과자 중 대학생이 30%나 됐다.
결국 은행에서 10년간 투자운용을 한 전문가는 전문인력이 되지 못하는 반면 이 방면의 업무에 경험도 없는 학생들이 전문인력으로 인정받았다.
◇ 행정편의주의 = 행정편의주의도 여전하다.
서울대 주승기 (朱承基.재료공학과) 교수는 최근 학교 내에 '테크뱅크' 라는 벤처기업을 만들었다.
반도체제조 및 시험장비 등 고가의 중고기계를 사들여 수리해서 되파는 게 주 업무다.
IMF관리체제 이후 수많은 연구소와 공장이 문을 닫으며 버려진 설비가 적지 않아 사업이 될 것이란 판단에서였다.
그러나 이런 기대는 성업공사의 입찰규정에 막혀 사실상 물거품이 됐다.
성업공사는 공장을 매각할 경우 토지부터 건물.기계.설비까지 일괄입찰을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런 판매는 시간이 많이 걸려 결국 남는 것은 부동산뿐이지 기계.설비 등은 거의 폐품이 된다.
고철가격으로 팔려나간다는 얘기다.
朱교수는 "자원낭비가 심하다" 고 항의해 보지만 성업공사는 수많은 기계.설비를 일일이 나눠 팔 수 없다는 말만 되풀이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