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433. 아라리난장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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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43면

제9장 갯벌

결국 조여사는 참을 수 없었다. 지루한 시간을 메우자고 시작한 화투판이 오히려 지루한 것을 자초한 것이라면, 애당초 잘못된 것이란 생각을 떨쳐버릴 수 없었다.

결국은 손씨에게 귓속말을 하였다. 처음에는 들은척도 않았다. 그러나 두 번째의 채근을 받고나자 손씨는 조여사를 방구석으로 이끌며 점잖게 타일렀다.

"무슨 생각으로다가 판돈을 올리자는 것입니까? 내가 보기엔 십만원 정도 따신 것 같은데, 시간 죽이자고 끼어드신거라면 됐으니 이제 잠이나 자 두시지요. " 그런데 볼멘소리인 조여사의 대꾸가 가관이었다.

"따긴 내가 무슨 돈을 땄다구 눈이 시뻘개서 그래? 십만원 딴 게 아니고 잃은 게 이십만원 정도여. 내 주머니에 손 넣어 봐. " "여사님. 럭비공이 어떻게 생긴 것인지 아는지 모르겠네…. "

"럭비공 생긴 것도 모르는 반편이 보따리 배 타고 다닐까. " "그렇다면 럭비공이란 게 어디로 튈 줄 아무도 모른다는 사실도 알고 있겠네. 섰다판이 바로 그럽니다. 지금은 이십만원 잃었지만, 나중 가선 이백만원을 잃을 수도 있고, 삼백만원을 일같잖게 딸 수도 있어요. 그러나 딱히 어떻게 된다는 보장은 하느님도 못합니다. 확실한 건 한가지도 없단 말이에요. 물론 나를 믿어서도 안되지요. 그러니까 서툰 솜씨 가지고 과욕부리지 말고 잃어버린 이십만원 가볍게 단념하고 뒷전에 누워서 잠이나 청하시오. 이런 아사리판에 여사님 같은 늙은이가 손바닥을 내미는 게 아닙니다."

무엇보다 늙은이라고 무시당한 것이 괘씸하고 억울했다. 늙은이가 손바닥을 내민다는 상스런 말도 쓸개를 뒤집는 충분한 빌미가 되었다. 귓속말을 하는 손씨를 홱 뿌리치고 조여사는 먼저 섰다판으로 돌아앉으면서 패를 쥐고 말았다.

손씨의 대꾸가 괘씸하다는 생각이 굳어지면서 오기가 불쑥 솟았고, 자신도 모르게 거액을 질러버렸다. 본때를 보여주자는 심산이었다. 그때가 여객선이 웨이하이 항구 도착을 불과 한 시간 남겨둔 시각이었다.

손씨의 만류를 받아들이지 않았던 것을 후회하기 시작했을 땐 벌써 조여사의 주머니에서 백오십만원 가까운 돈이 빠져나간 뒤였다.

그러나 진퇴양난이었다. 그야말로 빼도 박도 못할 낭패에 이르고 말았다. 삼베 고쟁이에서 방귀 새나가듯 흘러나간 돈이 이백을 넘었을 때, 두 눈이 시뻘겋게 충혈된 사람은 조여사와 손씨 뿐이었다.

여객선이 웨이하이 항구 도착을 알리는 경적을 울려주었을 때, 판꾼들은 본전치기 어쩌구 하면서 제각기 뿔뿔이 흩어지고 말았다. 방안에 남아 있던 사람도 그들 두 사람이 전부였다.

그제서야 조여사는 정신이 번쩍 들었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뿐 눈앞이 캄캄해지기 시작했다. 이토록 엄청난 낭패를 저지른 것은 육십평생에 처음이었다.

한 달 내내 배를 타고 중국을 왕래해도 벌 수 있을까 말까 한 금액을 하룻밤 손씨름으로 속절없이 날려버린 것이었다. 날려버린 것은 고사하고 중국에서 사올 물품 대금을 털려버렸으니 지금 당장이 낭패였다.

손씨가 엉거주춤 일어서며 옷매무새를 고치고 있었다. 조여사는 자신도 모르게 와락 손씨의 바짓가랑이를 뒤틀어 잡고 늘어졌다.

"어디로 가려고 그래?" 손씨의 대꾸가 천연덕스러웠다. "슬슬 내릴 준비 해야겠지요. " 그 유들유들하고 태연함이 태어날 때부터 보따리로 중국내왕을 일삼아온 사람 같았다. 가슴이 아프다 못해 따가웠다.

그러나 손씨의 옷자락을 놓칠 수 없었다. 그날의 판 돈이 모두 그의 점퍼 안주머니와 양말짝 속에 구겨 박혀 있었기 때문이었다. 손씨의 유들유들함에 기가 질렸으나 강단 있었던 조여사는 벌떡 몸을 일으키며 손씨의 혁대를 낚아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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