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수대] 다시 등장한 인력거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6면

현진건 (玄鎭健) 의 단편 '운수 좋은 날' 은 1920년대 사실주의 문학의 백미 (白眉) 로 꼽힌다.

이 소설은 지식인 중심의 자전적 (自傳的) 소설을 청산하고 현실을 정직하게 대면하면서 식민통치의 가장 큰 희생자인 민중을 본격적으로 다루는 작업의 시발점이 됐다는 점에서 문학사적으로 중요한 의미가 있다.

인력거꾼 金첨지에게 어느날 '행운' 이 닥친다.

아침 일찍 손님을 둘이나 태워 80전을 벌고, 돌아가는 길에 다시 1원50전을 벌었다.

막걸리를 한잔 걸치고 며칠 전부터 앓아 누운 아내에게 줄 설렁탕을 사들고 집에 와보니 아내는 죽어 있고, 세살배기 아들이 어미의 빈 젖꼭지를 빨고 있다.

金첨지는 "괴상하게도 오늘은 운수가 좋더니만…" 하며 통곡한다.

인력거는 일본인의 발명품이다.

메이지 (明治) 초기 서양마차에서 힌트를 얻어 말 대신 사람이 수레를 끌도록 고안한 것이다.

이듬해부터 인력거 사업이 시작됐다.

도쿄 (東京)에서만 1872년 1만1천40대, 76년 2만4천4백70대로 급증했다.

뿐만 아니라 '리키샤 (力車)' 라는 이름으로 아시아.유럽에 수출했다.

우리나라는 개화기에 도입돼 1911년 1천2백17대, 23년 4천6백47대로 증가했다.

도시에서 길눈 어두운 초행자들에게 인력거는 편리한 교통수단이었다.

좁은 골목길, 대문 앞까지 들어갈 수 있어 인기가 높았다.

의사는 왕진을 갈 때면 아무리 가까운 거리라도 인력거를 탔고, 삯은 환자에게 물렸다.

신문사는 기자들 취재용으로 인력거를 항상 준비해 뒀다.

인력거는 특히 기생들에게 요긴한 교통수단이었다.

요리집에서 손님의 부름을 받으면 인력거를 타고 갔다.

기생들은 인력거를 탈 때 호로 (幌) 라고 부르는 덮개를 뒤로 젖혀 '상품가치' 를 과시했다.

이와 달리 여염집 부녀자들은 남의 눈에 띌까 두려워 호로를 내리고 다녔다.

1930년대 들면서 인력거는 임대승용차 (택시)에 밀려 사양길에 들어섰다.

서울에선 해방이 될 무렵 거의 자취를 감췄고, 지방도시에서도 6.25 이후 사라졌다.

여기서 살아남은 인력거들은 어두컴컴한 뒷골목에서 취객들을 은밀한 곳까지 안내하는 수단으로 타락했다.

서울 시내 한복판에 인력거가 재등장했다.

서울시가 4대문 안 문화역사 탐방행사의 하나로 매주 토요일 정동에서 무료로 운행한다.

하지만 관광객들에게 눈요기 거리는 될지 몰라도 겉모양에서부터 왜색을 물씬 풍기는 것이 문화역사 탐방이라는 본래 기획 의도와 크게 동떨어진 느낌이다.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