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기 999년에는…]'말세기론'전유럽 풍미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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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4면

프랑스 중세역사학자 마르크 블로크는 999년 만큼 집요하게 종말론에 대한 의식이 사람들을 지배한 적은 없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미국의 언어학자 챨스 버리츠도 유럽의 기독교인들이 999년이 가까워짐에 따라 종말의 임박을 확신하고 있었다고 전한다.

파리 교회의 설교자들은 1천년의 전야가 종말의 시기라고 선언했고 당시 쓰여진 프랑스 플뢰리 수도원장 아보의 연대기에도 '성모의 수태고지 일과 성 금요일과 일치할 때 말세라는 소문이 퍼져있다' 고 기록할 정도로 멸망론은 대세에 가까웠다.

이에 따라 유럽 전역에 집단 히스테리 증상이 퍼져나갔다.

'심판의 날' 이 다가오자 사람들은 믿음을 굳건하게 하려 기도에 몰두했고 서로를 관용과 사랑으로 대하는 현상이 일어났는가 하면 생업을 팽개치는 현상으로 도시간의 교역이 줄고 농촌은 황폐해져 갔다.

또 폭도들이 형성돼 부자나 고리대금업자를 죽이는 일이 일어났고 심판의 날이 두려워 자살하는 이도 생겨났다.

대신 교회는 문전성시를 이뤘고 예루살렘으로 순례자들이 몰렸다.

실제 12월31일 밤 로마 베드로 대성당의 미사에는 참석자로 발디딜 틈이 없을 정도였다.

그러나 정작 성당의 시계소리가 12번을 치고도 아무 일이 없자 미사를 집전한 실베스텔 법왕은 신도들을 축복했다고 한다.

그렇게 999년 종말 해프닝은 막을 내렸다.

당시 국내는 고려 목종 (997~1009) 이 지배하던 시대로 999년은 1.2차 거란침공기 사이에 놓여있었다.

따라서 전쟁으로 인해 내정이 어수선한데다 목종의 나약함까지 겹쳐 백성들은 큰 어려움을 겪었다.

중국은 999년이 송나라 진종 2년으로 극심한 가뭄으로 인해 많은 백성이 굶어죽는가 하면 역시 거란과의 분쟁이 끊이지 않았다.

한편 일본에서는 999년 3월7일 후지산의 화산이 폭발한 사건이 일어나기도 했다.

물론 동양에서는 서기의 개념이 없었으므로 999년 종말론은 존재하지 않았다.

신용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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