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8문화계 송년브리핑]문학/리얼리즘.서정주의 부각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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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9면

"90년대는 군소시인의 시대" 라는 한 평론가의 발언은 '90년대' 를 '98년' 으로, '시인' 을 '문학작품' 으로 좌표조정해도 크게 틀리지 않을 성 싶다.

찬찬히 돌이키면 짚어볼만한 작품도, 신인작가도 적지않지만 그 폭발력은 예년에 미치지 못했다. 작가.독자 너나없이 삶의 기반을 뒤흔들고, 이들 사이 연결고리인 출판계를 강타한 경제난도 한 요인이지만 주 원인은 문학계 자체에 있단 것이 문단의 시선. 해체주의적 글쓰기든, 대중문화에 침잠한 일상의 묘사든 시대정신과 밀착한 80년대 문학의 강렬한 호흡을 대체할 무게중심을 찾지못한 90년대 전반의 연장이란 것이다.

특히 98년은 독자.비평가 어느 쪽 눈에도 이렇다할 이슈가 없는 것이 두드러졌다.

이같은 침묵을 암중모색으로 읽는다면, 지배적이지는 않아도 주목해 둘 경향 몇이 떠오른다.

소설은 젊은 작가들의 작품에서 리얼리즘의 전통적인 서사 구조가 다시 힘을 발휘하는 경향을 보였다.

현장에 밀착한 묘사로 생명력을 배가시킨 한창훈씨의 작품이나, 유년의 이야기를 90년대식 구어체로 표현한 성석제씨의 작품은 그 대표적인 예. 시는 그 무대가 도시든 농촌이든, 아늑한 과거든 피곤한 현재든, 90년대식 서정주의가 가로세로 확장되는 경향이 드러났다.

5년 만에 신작 시집을 내놓은 신경림씨를 비롯, 원로.중견들이 오랜만에 내놓은 시집들 역시 이같은 경향을 짙게 했다.

98년 문학계의 또 다른 대목을 보자.

◇ 마지막 대하소설 = 광주항쟁을 다룬 임철우씨의 '봄날' 5권, 10여년만에 완간된 이문열씨의 '변경' 12권 등 올해의 처음과 끝을 장식한 대하소설을 두고 문학과지성사 김병익대표는 "20세기 마지막 대하소설" 이라고 말했다.

동학, 6.25, 근대화를 거쳐 80년 광주까지 지난 1백년의 굵직한 장면이 이제 대부분 대하소설로 형상화됐다는 뜻. 이 사이 아동문학가 권정생씨는 6권 예정인 '한티재 하늘' 의 첫 2권을 내놓아 영웅이나 강력한 주인공이 없으면서도 '커다란' 강줄기의 물꼬를 틔워놓았다.

◇ 인공어 (人工語) 로 쓰는 소설 = 단행본 출간으로 독자에게 직접 다가서진 않았지만, 문예지 지면에 꾸준히 실린 김영하.조경란 등 젊은 작가 단편은 여전한 주목거리. 문학평론가 김윤식교수 (서울대 국문학과) 는 "한국어가 아니라 인공어로 쓰여진 작품" 이라고 평한다.

이들의 소재와 화법이 이전의 우리 문학과 확연히 다르다는 이 지적은 다음 세기 문학계 밑그림에 중요한 부분이다.

◇ 중진작가들의 장타 (長打) =침체한 문학시장에 기다리던 안타를 날린 것은 김주영씨의 '홍어' 와 양귀자씨의 3년만의 신작 '모순' .뒤이어 김형경.은희경.공지영 등 30대 여성작가 신작이 겨울대목을 만난 문학시장에 활기를 주기 시작하는 참이다.

황석영.박노해씨 등 사면후 본격 글쓰기 차비를 차리는 장타자들은 내년 문학계의 주요 화제를 예약하고 있다.

이후남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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