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뷰]'링' 3부작 작가 스즈키 코지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38면

"일본 대중문화는 2차 대전 이후 미국의 강력한 팝 (Pop) 문화에 맞서며 나름의 정체성을 찾으며 오늘날에 이르렀습니다. 앞으로 한국의 사정도 비슷할 것입니다. 문화개방으로 분명 영향은 받겠지만 상호 활발한 교류를 통해 한국 또한 자기 정체성을 찾아갈 것으로 생각합니다. 일본을 두려워 할 필요는 없지 않을까요. "

'링' 3부작 시리즈로 90년대 일본 최고의 베스트셀러 작가로 떠오른 스즈키 코지 (鈴木光司.41) .지난 5일 오후 6시 땅거미가 자욱이 깔린 도쿄시내 시나가와 프린스호텔 커피숍에서 만난 그는 일본문화 개방에 따른 한.일 양국의

앞날을 비교적 낙관적으로 내다봤다.

스즈키는 의외로 일본 대중문화의 현주소를 비판하며 말문을 열었다.

"일본문화는 아직 세계에 통용될 만큼 성숙하지 않았습니다. 작고한 영화감독 구로사와 아키라나 만화 정도나 있을까요. 일부에선 폭넓은 오타쿠 (매니어) 층을 일본의 강점으로 들지만 자기들만의 좁은 공간에 갇혀 있어 세계로 뻗어나가기엔 한계가 있습니다. " 그는 무엇보다 일본문화엔 역동성이 부족하다고 지적했다.

문학의 예를 들면 작가의 개별적 고통.번민을 토로하는 사적 (私的) 경향이 강해 세계인의 마음을 사로잡는 흡인력이 부족하다는 것. 한국에서 인기를 끄는 이유를 묻자 일본인에만 통하는 '색깔' 을 걷어내고 사람이라면 누구나 느끼는 공포심리의 뿌리를 건드린 까닭일 것 같다고 대답했다.

"일본은 지리적으로 섬나라입니다. 문화도 이런 제한을 크게 뛰어넘지 못하고 있어요. 반면 한국은 대륙문화의 정서를 갖고 있지 않습니까. 섬문화의 섬세함과 대륙문화의 활달함을 융합해 새로운 모델을 만들었으면 좋겠습니다. "

그가 꼬집은 한국문화의 맹점은 해외홍보.소개 부족. 한국을 알고 싶어도 변변한 번역서 하나 찾기 힘들다고 아쉬워했다.

문화란 본질적으로 대화요 소통인데 한국을 이해할 수 있는 기회가 너무 적다는 것. 문화개방에 대한 우려에 앞서 한국을 널리 알리는 일이 중요하다는 조언이다.

소설 얘기로 돌아가자 그의 목소리엔 더욱 힘이 실렸다.

우선 방대한 과학적 지식과 상상력의 원천에 대해 물었다.

그의 소설은 마치 현대과학의 '문학적 보고서' 처럼 읽히기 때문.

"현대는 과학의 시대입니다.현대철학도 결국 과학에 뿌리를 내리고 있어요. 과학을 모르고는 인간을 이해할 수 없거든요. 진화론.의학.물리학.인공생명.컴퓨터 등 관련서적을 탐독하고 전문가들로부터 자문도 구합니다. 독자들의 마음을 흔들려면 작가도 끝없이 공부해야 해요. "

스즈키는 흥미롭게 '강한 작가론' 을 내세웠다.

최근 '문학의 죽음.소멸' 등이 심심찮게 거론되는 것은 그만큼 작가들이 재미있는 이야기를 힘차게 써내지 못하기 때문이라고. 나아가 현재 일본소설은 남성적인 작품이 너무 없다고 비판했다.

젊은 여성작가들의 '내면고백' 이 가로질렀던 90년대 한국문단도 점검하게 하는 말이다.

공포소설이 불황에 희망을 상실한 일본사회의 자화상은 아닌가, 혹은 세기말적 종말론을 부추기는 것은 아니냐는 질문에는 정반대로 답했다.

오히려 희망을 보여주고자 했다는 것.

"어떤 재앙을 당하든 정면으로 맞서서 극복하는 경험을 쌓는 것만이 세계를 변하게 하는 거야" 라는 소설 속 주인공의 독백처럼 현실에서 부대끼며 활로를 개척하는 인간의 생명력을 긍정적으로 그려냈다고 설명했다.

공포소설 작가로는 믿어지지 않게 작은 체구에 유순한 얼굴의 스지키. 그는 "문제는 결국 인간이며 작가는 '어둠' 보다 '밝음' 을 제시해야 한다" 며 마중나온 어린 딸의 손을 잡고 총총히 사라졌다.다음 작품에선 아름다운 러브스토리를 쓰려고 16일쯤 태평양의 피지로 날아갈 계획이란다.

도쿄 = 박정호 기자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