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리핀·한국·남미와 인도네시아]독재치하 민주화 분출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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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8면

인도네시아 사태는 장기간 독재에 억눌렸던 국민들의 민주화 욕구가 분출됐다는 점에서 80년 한국의 광주민주화운동, 86년 필리핀 '피플 파워' 의 승리, 80년대 중반 남미의 군부독재 청산운동, 80년대말 동구권의 자유화 바람과 유사하다. 그러나 인도네시아는 민주화 욕구를 효과적으로 조직, 증폭시켜 큰 흐름으로 묶어낼 만한 정치적 구심점이 형성돼 있지 않다는 점에서 한계를 드러내고 있다.

5월들어 대학생들에 의해 본격화된 수하르토 하야 촉구 시위가 최근 단순 폭동사태로 변질하는 기미를 보이는 점이 한 예다.

86년 2월 20년간의 마르코스 장기독재를 몰아낸 필리핀 '피플 파워' 의 중심에는 하이메 신 추기경을 축으로 한 가톨릭 세력과 민주화의 상징으로서 조직력을 함께 갖춘 코라손 아키노 여사가 있었다.또 83년의 아르헨티나 민주화에는 실종자 가족단체 '5월 광장의 어머니들' 로 대표되는 민주화 세력이 있었으며 89년 폴란드 자유화에는 바웬사의 자유노조가 존재했다.

차우셰스쿠를 쫓아냈던 89년의 루마니아, 무혈혁명을 일컫는 '벨벳 혁명' 의 체코 등의 경우도 마찬가지다.이에 비해 인도네시아 사태는 사태의 주된 동력이 물가상승에 대한 국민불만인지 아니면 대학생들의 민주화 요구인지 분명치 않다.

또 해외언론의 전폭적인 지원에 힘입어 민주화를 외쳐댈 '스타' 도 없다. 전통적으로 인도네시아인들의 정치적 희생양이 되어온 화교 (華僑) 들에 대한 약탈.방화도 '결격사유' 로 지적된다.

광주민주화운동의 경우 처음부터 민주화 구호로 일관됐고 약탈사태도 없었다. 학생을 중심으로 한 인도네시아 민주화세력은 아직 가능성을 잃지는 않았다.

오는 20일을 '국민각성의 날' 로 규정, 대규모 시위를 계획하는 등 이들은 다시 정치적인 변수로 등장할 전망이다. 그러나 관건은 역시 반 (反) 수하르토 세력의 결속 여부다.

가중되는 경제난이 시민폭동으로만 분출될 경우 수하르토의 권력유지, 또는 인도네시아 최대 파워집단인 군부의 '궁정 쿠데타' 가 현재로서는 가장 유력한 시나리오로 보인다.

유광종 기자 〈kjyoo@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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