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BA 1차방어 성공 ‘탈북 복서’ 최현미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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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BA 여자 페더급 타이틀 1차 방어에 성공한 최현미 선수. “당장의 목표는 10차 방어”라고
당당하게 밝히는 그는 최고의 씨름선수 출신이자 연예인인 강호동처럼 되는
게 꿈이다. 프리미엄 황정옥 기자

WBA 1차방어 성공 ‘탈북 복서’ 최현미
사기계약 딛고 챔프 우뚝, 희망의 펀치 확 날렸다

지난달 30일 노원구 공릉동 서울산업대 체육관. 사각의 링은 왁자하진 않지만 진한 감동의무대였다. 탈북 소녀복서 최현미(19월계동)선수가 세계복싱협회(WBA) 여자페더급 챔피언타이틀 1차 방어에 성공한 것. 최연소 세계챔피언에 올랐으나 상대를 찾지 못해 챔피언 벨트를 반납당할 위기에 있던 때문일까. 그녀의 눈가엔 땀인지 눈물인지 모를 방울이 맺혀있었다.최 선수를 만났다.

평양 김철주 사범대 권투반 출신
“강호동 선배처럼 되고 싶어요. 스포츠에서도 챔피언, 예능 프로그램에서도 1인자가 된 그가 제 우상이죠.” 눈두덩에 시퍼렇게 든 멍이 채 가시지도 않은 최 선수는 장난기 섞인 웃음을 지으며 TV예능 프로그램에 꼭 한번 나가고 싶다고 했다. 시합 끝나면 남자선수들도 2주 정도는 앓아눕는 게 예사지만 1주도 지나지 않아 자리를 박차고 일어난 이 생기발랄한 권투소녀는 꿈도 당차다.
 
북한에 살던 12세부터 ‘재밌어보여’ 권투를 시작한 최 선수는 1년 만에 평양의 체육 영웅 양성소로 알려진 김철주 사범대학 권투 양성반에 스카웃될 만큼 소질을 보였다. 그러나 2004년 탈북하곤 아예 권투를 포기할까도 생각했었다. 체중조절에 지구력 훈련 등 까무러치기 직전까지 이어지는 ‘지옥훈련’ 을 되풀이하고 싶지 않아서였다. 하지만 타고난 승부근성은 그녀를 링으로 불러냈다. 한국학교에 입학한 후 ‘친구들보다 잘 하는 것이 없을까’ 고민하던 끝에 다시 글러브를 끼기 시작한 것. 서울체고로 진학한지 5개월 만에 최연소 국가대표로 선발되는 기염을 토했다. 권투 국가대표 사상 전무후무한 일이었다. 출중한 실력으로 선배들보다 먼저 국가대표로 선발되면서 눈총을 받기도 했다.
 
묵묵히 참고 학교생활을 하던 그는 자신을 가르치던 코치가 학교를 옮기면서 덩달아 서울체고를 그만뒀다. 이후 아마추어 여자권투로는 유일한 국제대회인 세계선수권대회를 겨냥해 사설체육관에서 꿈을 키웠다. 하지만 나이가 어려 대회 참가자격을 줄 수 없다는 대회조직위의 통보를 받고는 망연자실하기도 했다.

노원구청이 대회 후원사 나서 성사
“당시엔 정말 어른들이 원망스러웠어요. 그렇게 힘들게 훈련해왔는 데 연령제한이라니…. 어떻게 그런 기본적인 정보도 없이 고생을 시킬 수 있는 거죠?” 거기다 희망을 걸고 있던 올림픽 정식종목 채택이 불발되면서 아예 프로 전향을 결심한다. 그러나 세상물정 모르는(?) 탈북자들이 흔히 겪는 ‘사기’에 최 선수 가족도 예외없이 걸려들었다. 프로전향 계약서라고 무심코 찍어준 손도장에 모든 이권이 넘어가는 사기계약이 이뤄졌던것. 심지어 파이트머니마저 자신의 손에 들어오지 못했다. 다행히 법정분쟁을 통해 계약이 철회되면서 아버지인 최영춘씨가 매니저로 나서기 시작했다.

지난해 10월, 마침내 WBA 여자 페더급(57.150kg이하) 챔피언에 올랐다. 그것도 세계 최연소로…. 그동안의 고통을 한꺼번에 날려버리는 순간이었다. 기쁨도 잠시. 암담한 현실이 기다리고 있었다. 대전 상대와 후원업체를 구할 수 없어 방어전이 미뤄지다 챔피언 벨트를 반납해야 하는 처지에 몰린 것. 이 소식을 전해들은 노원구청이 대회 후원을 자처하고 나섰다. 비용 1억원 중 4000만원을 지원했다. 자칫 무너질뻔한 탈북 소녀의 희망이 되살아난 것이다. 링 위에서 한번도 쓰러져 본 적이 없다는 최 선수는 “그냥 이기는 게 재미있다”며 “링 위에서 상대가 두려운 적은 한번도 없었다”고 한다. 연세대 체육교육과 특기자전형을 준비하고 있는 그는 10차 방어전까지 성공한 후 깨끗하게 권투를 잊고 싶단다. 더 이상 올라갈 곳이 없다고 생각되면 새로운 분야에 도전하겠다는 것. 그의 눈매가 매섭게 번뜩였다.

프리미엄 김지혁 기자 mytfact@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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