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개 키워드로 읽는 과학책 ③ 물질과 가속기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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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릴레이 망원경 발명 400년, 다윈 탄생 200년, 과학을 바라보는 우리의 시선이 남다른 2009년입니다. 근대 과학혁명은 우리 삶을 송두리째 바꿔놓았습니다. 중앙일보와 ‘문지문화원 사이’는 과학 교양의 대중화를 위해 ‘10개 키워드로 읽는 과학책’시리즈를 매달 연재합니다.

 최근 개봉한 영화 ‘천사와 악마’에는 유럽입자물리연구소(CERN)가 등장한다. 이 연구소에서 훔쳐 낸 강력한 반(反)물질로 바티칸을 날려 버리려는 음모에 종교기호학 교수(톰 행크스)가 맞선다는 내용이다. CERN에서 지난해 스위스 제네바 인근에 준공한 것이 ‘거대 강입자 가속기(Large Hadron Collider·LHC)’다. 지하 100m 아래에 둘레 27㎞의 거대한 터널을 묻고 이 안에서 양성자를 가속하고 충돌시켜 궁극의 물질을 찾아보겠다는 것이다. 건설비용만도 10조 원이다.

미국에선 이것의 3배나 되는 ‘초전도 초대형 입자 가속기(Superconducting Super Collider·SSC)’를 추진하기도 했다. 냉전 종식과 경제 불황 등을 이유로 1993년 건설 도중 취소됐다. 인천국제공항을 건설할 때 쓴 사업비가 넉넉히 잡아도 8조 원에 못 미치니 가속기의 규모를 짐작할 만하다. 이름도 생소한 가속기에 천문학적인 돈을 쏟아 붓는 이유는 무엇일까?

만물을 잘게 쪼개다 보면 보통의 방법으로는 더 이상 나눌 수 없는 입자를 만난다. 가속기는 이 입자들을 빛의 속도에 가깝게 가속시켜 다른 입자를 때리는 장치다. LHC에서는 양성자가 서로 초당 10억 번 충돌한다. 가속된 입자의 에너지가 클수록 더 많은 정보를 얻을 수 있다. 가속기가 만들어 내는 상황은 일상에서 경험할 수 있는 것과 사뭇 다르다. 거대 가속기가 태초 우주의 모습을 재연할 것이라고도 하고, 미니 블랙홀이 만들어질 수도 있다. 더 이상 쪼갤 수 없는 궁극의 물질을 찾을지도 모른다. 원자폭탄을 통해 물리학의 힘을 알게 된 열강들은 더 높은 에너지를 얻기 위해 막대한 가속기 건설비를 감당해왔다. 하지만 이는 헛된 환상에 기초한 낭비는 아닐까?

포항 방사광 가속기에서 나오는 X선이 형광물질 스크린에 비치고 있다. 이 X선은 병원에서 흔히 보는 X선보다 수억배 이상 밝다. 이를 동물에 투과시키면 살아 있는 그대로의 내부 모습을 볼 수 있다. X선이 반사돼 산란되는 패턴을 분석하면 단백질의 3차원 구조도 알아낼 수 있다. [중앙포토]


물론, 가속기를 운영하는 과정에서 얻는 부산물에서 생각지 못했던 쓸모를 찾는 경우도 많다. 대표적인 것이 가속된 입자에서 나오는 엄청나게 밝은 X선이다. X선을 쏘았을 때 투과하거나 튕겨져 산란되는 패턴을 보면 물질의 구조를 알 수 있다. DNA의 구조를 밝힌 것도 이런 방식이었다. 강력한 X선을 얻는 것을 목적으로 하는 가속기를 방사광가속기라고 한다. 현재는 4세대 방사광 가속기가 세계 여러 곳에서 건설되고 있다. 처음 DNA의 구조를 보여준 X선보다 1억 배의 1조 배 정도 더 밝은 X선 레이저를 만들 수 있는 가속기다. 물거품이 되긴 했지만 레이건 정부는 이를 전략방위구상(SDI)의 일환으로 검토했었다. 초대형 가속기에서 나오는 X선 자유전자 레이저로 인공위성이나 대륙간탄도미사일(ICBM)도 격추할 수 있다는 이야기다.

하지만 가속기 연구의 ‘부산물’로 얻은 가장 강력한 ‘무기’는 ‘월드 와이드 웹(World Wide Web)’일지도 모른다. CERN이 개발한 이 기술은 무상 공개돼 오늘날 인터넷 시대를 열었다. 만약 이 기술을 돈 주고 팔았다면 초대형 가속기 10개 쯤은 너끈히 지었을 거란 말도 있다.

최첨단 가속기 1기의 건설에는 한 국가의 과학예산과 맞먹거나 훌쩍 뛰어 넘는 돈이 필요하다. 가속기 건설을 둘러싼 논의는 이제 과학자들만의 문제가 아니라 납세자 전체의 문제가 됐다. 한국도 현재 중이온 가속기와 4세대 방사광 가속기 건설을 시도하고 있다. 비용은 조 단위로 추산된다. 당신은 우주의 신비를 밝히기 위해 수십조 원을 쓰는 데 동의할 수 있는가? 비용도 좀 적게 들고 여러 산업·기술 분야에 쓸모도 많은 방사광 가속기 정도는 괜찮은가? 현대의 거대과학은 우리 모두의 문제다.

김형도 포항가속기연구소 책임연구원



 5월의 과학 키워드 ‘물질과 가속기’를 주제로 필자 김형도 박사가 직접 강연합니다. 강연은 23일(토) 오후 5시 서울 마포구 동교동 ‘문지문화원 사이’에서 열립니다. 홈페이지(www.saii.or.kr)에서 신청하시면 무료로 참가하실 수 있습니다. 학생을 동반하시는 경우에 부모님과 학생 모두 참가신청을 해 주시기 바랍니다. 선착순으로 마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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