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문기자 칼럼]한배 탄 운명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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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7면

김대중 (金大中) 대통령은 해외의 굵직한 금융인들을 자주 만나는 편이다.

연초 헤지펀드의 대부 (代父) 격인 소로스를 만났고 지난주엔 시티은행 로즈 부회장을 만났다.

사실 대통령을 비롯한 우리 정부관리.정치인들이 외국 기업.금융인들과 개인적인 친분을 맺는 것은 때늦은 감이 있다.

그런데 순서를 따지자면 국내 기업인들과의 친분이 먼저일 것이다.

대통령이나 정부의 고위관리가 재벌회장 또는 은행장들을 '소집' 할 때는 공식.집단적이고 정부 방침을 통고하는 것이 보통이다.

협조를 구하지만 실은 지시나 다름없다.

구조조정과 관련된 공식모임들도 예외가 아니다.

개별적인 만남은 극히 이례적이어서 언론이 주목하게 마련인데 金대통령과 김우중 대우그룹회장과의 회동이 그런 예에 속한다.

투명한 시대에 걸맞는 정부와 재계의 관계는 어떤 것일까. 골드먼 삭스 호매츠 부회장의 설명에서 힌트를 얻을 수 있다.

"워싱턴 정가와 뉴욕 금융가 사이엔 미묘한 흐름이 존재한다.

월가는 정부가 뭘 원하는지 알기 때문에 정부가 중요시하는 정책을 주목한다.

그렇다고 정부가 원하는 것을 월가가 반드시 해야 한다거나 정부가 월가에 대해 이것 또는 저것을 하라고 요구하는 것은 아니다.

동시에 정부는 정책수립에 필요한 시그널을 월가로부터 얻는다.

특정 정책에 대해 시장이 어떤 반응을 보일지 궁금하기 때문이다.

특히 재무부.연방은행은 각종 경제문제에 대한 재계의 의견을 수렴하기 위해 월가 사람들을 끊임없이 접촉한다.

이런 쌍방통행식 의사소통이 원활한 이유는 워싱턴에서 일하던 사람들이 뉴욕에 있고 뉴욕의 금융인들이 워싱턴으로 진출하기 때문이다."

호매츠 부회장은 국무부 경제차관보 등 13년을 워싱턴에서 보냈고 루빈 현 재무장관도 골드먼 삭스 회장을 지냈다.

정부요직과 재계사이를 왔다갔다하며 협력관계를 다진다 해서 '셔틀외교' 또는 '회전문' (swinging door) 으로 부른다.

미국서는 이런 교류가 일상화돼 있다.

IMF시대를 하루라도 빨리 청산하려면 정부와 재계는 지금처럼 윽박지르고 뻗댈 것이 아니라 호흡이 맞아야 한다.

더욱이 우리의 경쟁상대는 국경 저편에서 오늘도 몸집 불리기에 바쁘다.

한 은행이 수백조원의 자산을 가져도 자랑거리가 아니다. 미국 제일의 투자은행 메릴린치가 지난 4분기중 중개한 증권발행 규모는 무려 85조원이다.

지금이야말로 앞에서 당기고 뒤에서 미는 건설적 협력관계가 필요한 때다.

권성철〈전문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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