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성호 세상보기]어느날의日省錄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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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7면

먼 훗날 어느 사료학자 (史料學者)가 정부문서 창고를 뒤지다 3편의 일성록 (日省錄) 을 발견했다.

일성이란 매일 자기의 행실을 반성하며 그것을 글로 적어 놓은 것인데, 이 학자가 발견한 일성록은 1998년 2월 23, 24일께 기록된 것이라고 한다.

기록자는 당시의 국가 최고통수권자 및 제2인자로 알려졌다.

이미 실존하는 조선조 후기 1백50년간의 일성록은 영조~고종연간의 왕의 언동을 기록한 책. 이번의 일성록이 그것처럼 국보로 지정될지는 알 수 없지만 기록자의 심경이 진솔하게 나타나 있어 일부 소개한다.

(참고로 이 기록은 떠나는 사람, 들어오는 사람, 기다리는 사람의 순서로 발견됐다. )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되구나. 내가 무슨 소득을 보자고 이렇게 땀을 흘렸단 말인가.

끝내 나에게 돌아온 소리는 5년 동안 국가경제를 거덜냈다는 비난밖에 없구나. 그건 너무 심하다.

IMF로부터 구제금융을 받았을 뿐인데. 두렵고 두렵다.

개혁이니 사정이니 세계화는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평균 열한달마다 내 앞을 스쳐간 고관대작들은 지금 어디서 무얼 하고 있나. 외환위기를 왜 사전에 대처하지 못했느냐고 사람들은 종주먹을 대며 묻는다.

대통령의 체면을, 국가 위신을 생각하느라고 일을 그르쳤단 말이오. GNP 1만달러를 유지하려고 얼토당토않게 고평가된 원화환율을 지키기 위해 달러를 펑펑 써댔단 말이오. 이 울적한 마음 시로나 달래볼거나. 내 벗이 몇이나 하니 수석과 송죽이라/동산에 달 오르니 기 더욱 반갑고야/두어라 이 다섯밖에 또 더하여 무엇하리. "

"왜 이리 가슴이 설렌단 말이냐. 71년 절대권력자와 싸우면서 곧 청와대에서 만나자고 한 약속이 실로 27년만에 실현되는구나. 세월이여 역사여 준비된 나를 위해 백지를 마련하려무나. 그 얼굴들이 스쳐 지나간다.

법대로며 대쪽인 사람, 깜짝 놀랄 만한 젊은이 (그가 그인가?) .그런데 왜 이런 시 구절이 눈에 띄는 것일까. 48킬로의 인간이/체중기 위에 올라 섰다.

/군의관의 찡그리는 표정을 피해/바라보는 먼 하늘/자꾸 가벼워지는 육체/약하기 때문에 학살당한/스파르타 소년의 먼날의 이야기. (김요섭의 1954년 시 '체중' 에서) 두렵고 두렵다.

내 인기가 80%에 올랐다고 한다.

일을 시작하고 얼마 후에 치솟는 인기는 후일 무엇을 기약하는지 나는 안다.

나를 또 정치 9단이라고 한다.

오 그 찬사의 허망함이여. IMF 1년반 안에 졸업? 코웃음치는 소리가 들린다.

인치 (人治) 의 냄새가 난다, 아들과 친인척을 멀리하라,가신을 물리쳐라. 벌써부터 쏟아지는 주문이 골치를 때린다.

앞날은 진정 두려운 시절이로고. "

"나는 기다리는 사람. 일출봉에 해 뜨고 월출봉에 달 떠도 나는 기다리는 사람. 일으키고, 이어오고, 뒤집은 사람이 있지만 나야말로 이제 결 (結) 해야 할 사람. 주마등 (走馬燈) 처럼 40년이 흐른다.

그날 새벽의 혁명공약, 자의반 타의반 외유, '임자는 기다리고 있어' 하는 속삭임, 10월유신, 서울의 봄, 빼앗긴 농장, 그리고 아 토사구팽 (兎死狗烹)!

인사청문회를 하자고? 그래 하자 해. 구상유취 (口尙乳臭) 한 사람들 같으니. 두려울 것 없다.

며칠 후면 농촌의 사는 모습을 보러 갈 거야. 그들의 투박한 손에 막걸리를 따라주고 '여러분 제가 곤드레 하면 만드레 하면서 죽 들이켜세요' 할거야. 그리고 불안.불신.부정 등 3불추방에 하나를 덧붙여 고창할 거야. 3金시대는 나로써 끝난다고. "

김성호<수석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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