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맙다, 한류” 어깨 펴는 재일동포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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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일 도쿄 아자부주방(麻布十番) 재일본대한민국민단(민단) 중앙본부. 일본 전국에서 몰려든 민단 회원들은 서로 “안녕하시므니까. 건강하시므니까”라며 우리말로 인사했다. 발음은 서툴고 문장도 어색했지만 밝은 표정이었다. 이날 민단 대표들은 1945년 광복 이후 처음으로 ‘우리말 쓰기’ 결의대회를 열었다.

정진 민단 단장은 서툰 한국말로 “오늘부터 민단은 간부부터 솔선수범해 우리말을 사용하고 전화 응대도 우리말로 하기로 했다”며 ‘우리말 사용 권장운동’을 선언했다. 행사장에는 인터넷을 통한 한글 교육 방법이 소개되고, 일본에서 사용되고 있는 한글 교재 등도 전시됐다. 즉석에서 교재 문의를 하는 동포들도 줄을 이었다.

재일동포들이 달라졌다. 해방 이후 일본에 삶의 터전을 잡은 이들이 ‘우리말 되찾기’에 나선 것이다. 일제의 피해자이면서도 일본에서 ‘조선인’이란 차별을 받으며 살아야 했던 재일동포들은 어쩔 수 없이 일본어를 사용해야 했다. 조총련계 재일동포는 북한의 교육 지원으로 조선학교에서 철저하게 우리말을 사용해 왔지만 한국계 민단 회원들은 대부분 일본 학교에 다녀 한국말은 ‘외국어’처럼 돼 버렸다.

민단에 한글 사용운동을 권장해 온 권철현 주일대사는 “언어를 잃는 것은 얼을 잃는 것이고, 얼을 잃으면 조국을 잃는다”며 “해마다 7000~8000명의 재일동포가 일본인으로 귀화하고 있는 것도 말과 얼을 잃고 있는 것과 무관치 않다”고 지적했다. 재일동포는 민단 계열 50만여 명과 조총련 계열 9만여 명을 합쳐 약 60만 명이다.

민단이 ‘우리말 찾기’에 나선 것은 모국의 국력 신장과 한류 영향으로 민족 정체성에 대한 관심이 크게 증가한 결과다. 이용철 와세다(早<7A32>田)대 정치학과 교수는 “지금도 일본인들끼리 대화할 때는 ‘조센(조선)’을 사용할 정도로 과거 이미지를 토대로 한국을 보는 시각이 많지만 서울올림픽 이후 서서히 변화가 일기 시작했다”고 말했다. 일본인의 한국에 대한 시각이 달라지면서 재일동포들의 조국에 대한 자긍심이 커진 데다 한류 영향으로 한국의 이미지가 한층 올라가자 재일동포들이 자신감을 갖게 된 것이다.

재일동포들은 또 민단을 중심으로 민족 금융기관에 ‘1인 1통장 갖기 운동’을 벌이기로 했다. 민단의 정 단장은 “조국의 경제 활성화와 재일동포 사회의 경제 회복을 위해 한 계좌에 10만 엔 이상 저축해 1년 이상 유지하는 정기예금 가입을 목표로 하고 있다”고 말했다. 재일동포가 설립한 8개 신용조합과 기업은행 등 6개 한국 시중은행이 참여한다.

80년대 이후 유학·취업 등으로 일본에 정착한 한국인들도 일본 속 한국인 사회의 변화를 자극하고 있다. ‘올드 커머’로 불리는 민단계 동포들과 구분하기 위해 ‘뉴 커머’로 불리는 이들은 22일 도쿄에서 ‘신주쿠(新宿) 한인 발전위원회’를 결성했다. 그리고 뉴 커머들의 상점 300개 정도가 있는 신주쿠 쇼쿠안(職安)·오쿠보(大久保) 거리 일대에 ‘코리아 타운’을 조성키로 했다. 2001년 선로에 떨어진 일본인을 구하려다 사망한 고 이수현씨로 인해 널리 알려진 지역이다. 기업인·자영업·식당 등 뉴 커머들의 단체인 재일본한국인연합회(한인회)의 조옥제 회장은 “일본인들과의 융화를 위해 신주쿠 구청·현지 일본인 상인들의 참여를 유도하면서 지금보다 한 단계 수준 높은 거리로 만들겠다”고 말했다.

도쿄=김동호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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