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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할머니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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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41면

“중국의 예의가 비롯되는 것은 바로 혼인의 예입니다. 음이 양을 쫓아 여자가 남자의 집으로 가서 아들과 손자를 낳아 내가(內家)에서 자라게 하니 본종(本宗)이 중한 줄을 알게 됩니다. 그러나 우리 동방은 모든 문물을 중국을 본받으면서 오직 혼인례는 굳이 옛 습속을 따라 양이 음을 쫓아 남자가 여자 집으로 가서 아들과 손자를 낳고 외가에서 자라게 하니 사람들이 본종이 중한 줄을 알지 못합니다.”

조선 태종 14년(1414) 의정부의 논의다. 요지는 조선의 혼인 습속이 남자가 여자 집으로 가서 외가만 중한 줄 안다는 것이다. 우리나라는 오랫동안 혼인에서 남자가 움직였다. 그러니까 ‘시집을 가는’ 것이 아니라 ‘장가(丈家)를 드는’ 것이었다. ‘장가를 든다’는 것은 장인 집으로 들어가 산다는 뜻이다. 지금도 어른들이 총각들에게 ‘언제 장가가느냐’고 묻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조선은 물론 이를 그대로 두고 싶어 하지 않았다. 중국처럼 되기를 바랐다. 당시 중국 제도는 곧 선진적인 것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사람들, 특히 양반들은 말을 잘 듣지 않았다. 남자가 여자 집에 가서 살면 자연 여자 집의 경제적인 부담이 커진다. 그래도 사람들은 이 시스템을 더 편리하게 여겼다. 부담보다는 공조로 생각했던 게 아닌가 싶다. 어쨌든 장가드는 혼속은 쉽게 바뀌지 않았다.

18세기 영남의 대표적인 관직자 권상일(1679~1759)이 며느리 들이는 과정은 흥미롭다. 1725년 2월 7일에 아들은 처가로 가서 다음 날 혼례를 치른다. 그 다음 날 신행에 따라갔던 사람들이 돌아오고, 아들은 5일 뒤에 온다. 그런데 며느리는 그대로 친정에 머물러 있다. 시아버지 권상일은 며느리를 보지 못한 채 다만 신행 갔다 돌아온 사람들이 며느리가 ‘현명해 보인다’고 하는 말을 듣고는 집안의 경사라며 기뻐할 뿐이다. 그리고 며칠 후 아들이 전해 주는 며느리의 첫 편지를 받는다.

이후 아들은 한두 달에 한 번씩 처가엘 간다. 한 번 갈 때마다 대략 7, 8일 정도 머문다. 그리고 권상일 자신은 아들이나 노비를 통해 사돈 또는 며느리와 편지를 주고받는다. 이렇게 시간을 보내다가 혼인 2년5개월 만인 1727년 7월 22일에야 비로소 며느리가 시집으로 온다. 그 사이에 며느리는 아들을 낳아서 7, 8개월이 되었다.

국가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18세기까지도 여자가 혼인 후 친정에 머무르는 습관은 사라지지 않았다. 기간만 짧아졌다. 20세기 초까지도 시골에서는 이른바 ‘해묵이’라고 해서 신부가 1, 2년 친정에 있는 것이 예사였다. 이런 풍속에서 외가는 가까울 수밖에 없지 않을까. 외가에서 태어난 아이들은 커서도 자주 외가에 드나들었다. 자연 외가쪽 친척들을 더 편하게 느끼게 되는 것이다.

이쯤 되면 오늘날 왜 외할머니가 아이들을 더 많이 키우는지가 이해되지 않는가. 우리의 외가와의 친연성은 그 연원이 꽤 오래됐다.

이순구 국사편찬위원회 연구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