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산 카드로 GM 노조·채권자 투항 노려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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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8호 28면

“버락 오바마가 치킨게임을 선언했다.”
미국 투자은행 모건스탠리의 채권 투자 전략가인 그레고리 피터스의 말이다.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이 자동차회사 GM과 크라이슬러의 채권자·노동조합을 상대로 배짱 싸움을 시작했다는 것이다. 상대를 향해 차를 몰고 가는 치킨게임이다. 먼저 겁먹고 운전대를 돌리는 쪽이 진다.

오바마의 자동차 치킨게임

오바마는 출자전환을 채권자들에게 요구하고 있다. 채권을 내놓고 GM이나 크라이슬러 보통주를 받는 것이다. 또 오바마는 GM과 크라이슬러가 부담해야 하는 복지기금을 깎아 주도록 노조를 압박하고 있다. 채권자·노조는 계약을 들어 물러서지 않고 있다.

특히 노조는 일부 조합원을 정리해고하는 정도만 양보할 뿐 복지기금 대폭 삭감 등을 받아들이지 않고 있다. 노조는 시간이 자신들의 편이라고 판단하고 있다. 미 경제 전체를 걱정해야 하는 오바마가 결국 자동차업체들에 자금을 지원할 것으로 보고 있다. 갑자기 GM이나 크라이슬러가 무너지기라도 하면 미 경제가 다시 요동할 수 있다. 이러면 오바마의 정치적 부담은 더욱 커질 수밖에 없다.

이에 맞서 오바마는 파산보호 신청이라는 카드를 꺼내 들었다. GM이나 크라이슬러를 미국 파산법 11장(Chapter 11)이 규정한 절차를 밟도록 할 수도 있다는 것이다. GM 경영진이 오바마의 지시대로 파산보호를 신청하면 법원은 모든 채무를 동결한다. 채권자·노조가 돈을 받기 위해서는 법원의 심사·판단을 기다려야 한다. 한 푼도 받지 못하고 동결될 가능성이 작지 않다. 법원이 지급을 결정하더라도 상당한 시간이 걸린다. 그 기간 동안 채권 가치는 뚝 떨어진다. 복지기금에 의지해 살아가는 GM과 크라이슬러 퇴직자들은 법원이 심리하는 동안 한 푼도 받지 못한다.

오바마가 파산보호 카드를 본격적으로 내비치기 시작한 것은 GM과 크라이슬러 경영진이 제출한 구조조정 방안을 거부한 지난달 30일 이후다. 그는 백악관 참모들의 입을 통해 파산 가능성을 흘렸다. 리처드(릭) 왜고너 회장 겸 최고경영자(CEO)까지 물러나도록 했다. 왜고너는 파산보호 신청에 반대했다. 대신 고분고분한 재무통인 프레드릭(프리츠) 핸더슨을 임시 CEO로 선임했다. 핸더슨은 왜고너 밑에서 일상적인 경영을 책임지는 최고운영책임자(COO)였다. 그는 선임 직후 “파산보호 절차를 밟는 게 회사를 살리는 데 좋다”는 의견을 밝혔다.

오바마는 파산보호 신청 이후 회사를 우량과 비우량 회사로 나눠 정리하는 방안까지 흘리고 있다. 부실 자산과 부채를 비우량 회사에 모은 뒤 정리하고, 쓸 만한 자산으로 구성된 우량 회사만 살리겠다는 것이다. 이렇게 되면 채권자·노조가 한 푼도 받지 못할 수도 있다. 이들에 대한 지급의무를 비우량 회사에 몰아 정리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오바마가 처음부터 GM 등에 냉정한 것은 아니었다. 그는 지난해 11월 대통령 당선 직후부터 3월 초 주례 라디오연설까지 자동차 산업에 대한 애정을 감추지 않았다. 그는 “자동차 산업은 미국 산업의 주춧돌(당선 후 첫 기자회견)” “일자리를 지키기 위해 자동차 산업을 지원해야 한다(지난해 11월 조지 부시 당시 대통령에게)”고 강조했다. 또 “친환경 자동차 개발에 투자해 미국 자동차 산업이 (일본이나 한국 등을) 능가하도록 하겠다(2월 의회 연설)”고 약속하기도 했다.

그런데 지난달 15일 전후 그의 태도가 돌변했다. 백악관 자동차대책팀에 파산전문 변호사를 합류시켰다. 이어 GM과 크라이슬러의 사태가 “리더십 실패 때문”이라고 몰아쳤다. 이어 GM 경영진을 전격 교체했다. 미 민주당 좌파 등은 “오바마가 월스트리트 금융회사에는 관대하게 공적자금을 투입하면서도 자동차 회사에는 원칙을 고수하고 있다”고 비판했다.

오바마의 태도 돌변은 어쩔 수 없는 선택이라는 시각이 우세하다. 채권자의 출자전환과 노조의 복지기금 삭감 등이 없으면 미 정부가 돈을 지원해 봐야 밑 빠진 독에 물 붓기나 다름없기 때문이다. GM이 짊어지고 있는 빚과 복지기금에 내놓아야 하는 금액은 모두 620억 달러에 이른다. 오바마가 GM 경영진이 원하는 대로 자금을 지원한들 이 돈은 대부분 채권자나 노조의 수중으로 들어가기 십상이다. 친환경 자동차 개발 등 회사 경쟁력을 높이는 쪽에 투입할 돈은 얼마 되지 않는 셈이다. GM은 지난해 134억 달러를 지원받았다. 추가로 166억 달러를 지원해 달라고 요구하고 있다.

GM의 새 CEO 핸더슨은 앞으로 두 달 안에 채권자와 노조를 설득해 양보를 받아 내야 한다. 오바마는 부채 등을 갚는 데 필요한 620억 달러를 150억 달러 이하로 줄이기를 내심 원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그러려면 채권자와 노조가 자기 몫을 3분의 2 정도 깎아야 한다. 크라이슬러 경영진도 비슷한 수준의 양보를 받아 내야 한다. 그들이 받아들이기 쉬운 카드가 아니다. 모건스탠리의 피터스는 “오바마도 이 점을 잘 알고 있다”고 말했다. 그래서 그는 “오바마가 파산보호를 신청할 가능성이 크다”고 예측했다.

사실 미 정부 자금 투입 측면에서 보면 파산보호를 신청하는 것이나 채권자·노조의 양보를 받아 내는 것이나 큰 차이가 없다고 전문가들은 말했다. 어느 쪽이든 미 정부 돈이 들어갈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단 파산보호 신청이 야기하는 심리적 충격이 적지 않기 때문에 오바마가 GM과 크라이슬러 경영진에 각각 두 달과 한 달이라는 말미를 주며 치킨게임을 벌이고 있다고 월가 전문가들은 풀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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