텅텅 빈 빌딩 … 매수세는 조금씩 꿈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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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8면

서울 서초구 서초동 지하철 2호선 교대역 근처에 있는 D빌딩은 준공 4개월이 지났지만 15개 층 가운데 12개 층이 비어 있다. 대형 플래카드를 내걸어도 사무실을 쓰겠다는 기업의 발걸음이 요즘엔 아예 없다고 건물주는 전했다.

서울 도심 업무용 빌딩이 겪는 임대난이 심각하다. 지난해 하반기부터 지속된 경기 침체로 입주 기업들이 사무실 면적을 줄이거나 임대료가 싼 외곽으로 떠나면서 임차인을 구하지 못한 빈 사무실이 크게 늘고 있다. 부도·폐업 등으로 사무실 임대 수요가 급감한 것도 원인이다.

신영에셋 조사에 따르면 2월 말 현재 서울 지역 대형 오피스 빌딩의 평균 공실률은 3.1%로 지난해 말보다 1%포인트 늘었다.

임대난은 강남 테헤란로 일대가 심하다. 곳곳에 ‘임대’ 현수막이 널려 있다. 역삼역의 S타워는 물론 K타워, A빌딩, K빌딩 등 요지에 있는 유명 빌딩에도 빈 사무실이 속출하고 있다. 지난해 상반기까지만 해도 공실률이 1%대로 임차인 걱정이 없었지만 지금은 세입자 구하기가 하늘의 별 따기다.

전문가들은 공실이 늘면서 2분기부터는 임대료도 본격적으로 떨어질 것으로 보고 있다. 포시즌컨설팅 정성진 대표는 “올 들어 문을 닫았거나 규모를 줄여서 임대료가 싼 외곽으로 떠난 기업체가 많다”며 “오히려 구로구 등 임대료가 싼 중소형 건물의 공실이 줄고 있다”고 말했다.

경기가 나빠지자 빌딩 매물도 늘었다. 부동산 업계에 따르면 현재 서울에 매물로 나온 연면적 1만㎡ 이상 대형 빌딩은 20여 개, 3조5000억원에 이른다. 서울 중구 충무로 극동빌딩, 역삼역 인근 ING생명 빌딩과 아주산업 빌딩 등을 비롯해 강남역 신성건설 빌딩과 월드건설 빌딩, 교대역 우림건설 사옥 등이 새 주인을 찾고 있다. 글로벌 금융회사와 구조조정이 진행되고 있는 건설회사 사옥 등이 대부분이다.

그나마 빌딩 매수세가 살아 있는 게 다행이라고 빌딩업계는 전한다. 경기 침체로 임대시장은 큰 어려움을 겪고 있지만 대형 오피스 빌딩에는 투자자들의 관심이 높아지고 있다는 것이다.

신한은행 이남수 부동산팀장은 “유동성 위기에 몰린 기업들이 사옥 등을 매물로 내놓으면서 가격이 많이 떨어지자 매수세가 달라붙고 있다”며 “외국자본뿐 아니라 국내 큰손들도 관심을 많이 보인다”고 전했다.

국민은행 박합수 부동산팀장은 “IMF 때 외국계 기업들이 가격이 폭락한 도심 빌딩에 투자해 많은 시세차익을 얻었다”며 “요즘 공실이 늘고 있지만 값이 떨어져 투자가치가 있다고 보는 것”이라고 말했다. 실제 올 들어 남대문 메세타워 등 4건의 빌딩이 지난해 호가보다 평균 20% 이상 떨어진 값에 팔렸다.

황정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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