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문열씨 '선택'에 답한다 … 소설가 공지영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42면

지난 일년 동안, 참석하는 자리마다 이문열씨에 대한 질문을 받으면 나는 침묵했다.

문학 소녀였던 시절에 읽은 그의 어느 수상소감, 즉 "이름을 내걸고 여러 차례 시끄러운 논쟁을 벌이는 이들" 이 "결국은 문학정신을 몰아내는 질 나쁜 검열관" 들이고 "둘 다 길을 잘못 든 속인 (俗人)" 이라는 문구를 감명깊게 읽은 탓이기도 했을 것이다.

하지만 이제 글을 시작한 것은 이 논의가 여러 사람들을 상처 입히며 번지고 있는데 대해, 본의 아닌 원인 제공자로서 일말의 책임을 느껴야 한다는 생각 때문이다.

나는 이 자리를 빌어 이 논쟁 아닌 논쟁의 본질이 나를 포함한 일부 '잘못된 여성해방론자' 와 이문열씨 사이의 말싸움에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분명히 하기 위해 몇가지 생각을 달리하는 점들을 되짚어 보고자 한다.

무엇보다 나는 그가 이 시대 여성들의 현실을 얼마나 마음으로 이해하고 있는지 걱정스럽다.

예컨대 명예퇴직의 위험에 놓인 남편의 짐을 조금이라도 덜까, 큰애는 놀이방에 맡기고 작은애는 들쳐업고, 처음 장만한 25평짜리 아파트 융자금을 갚기 위해 떡볶이 가게를 알아보고 다니는 이 나라 여성들의 현실 말이다.

이들에게 이른바 '자아실현' 을 위해 가정주부가 될까, 직장을 얻을까 하는 '선택' 같은 것은 차라리 행복에 겨운 타령일 게다.

둘째, 그가 어느 대담에서 지적한 대로 나 역시 늘어나는 비행 청소년과 그들이 이끌 미래가 두렵다.

다만 그 원인이 이혼을 하고 집을 뛰쳐 나오는 여성들이 만들어 놓은 '결손가정' 에 있다는 그의 안이한 발상이 어처구니없다는 것이다.

이문열씨의 말대로 "이혼 증가율과 청소년 비행 증가율이 비례" 한다면, 우리보다 훨씬 높은 이혼율을 자랑하는 스웨덴이나 독일의 미래는 차라리 참혹하지 않을까. 사실 페미니즘이 무엇인지 잘 모르는 내가 여성들의 이야기를 쓴 것은 우리 여성들이 이 암울한 미래를 조금이라도 바꾸어 놓기 위해 무엇을 할 것인가에 대한 고민에서 출발한 것이었다.

내일이 오면 무조건 동이 튼다고 순진하게 믿어서도 안되지만 암울한 미래에 대해 포기할 정도로 늙어버려서도 안된다는 생각이었다.

셋째로, 혹자의 표현대로 이문열씨의 '선택' 이 여성들보다 평균 40%의 임금을 더 받고 있는 남성들의 일자리를 '위협' 하는 여성을 내몰기 위한 '불황기 자본의 논리' 를 대변한 것은 혹 아닌가 당황스럽다.

불황이 여성이 부엌으로 돌아간다고 극복될 문제는 아닐 것이다.

작가는, 아니 적어도 지식인과 모든 양심적인 사람들은 언제나 버려진 사람들과 소외된 자들과 함께 해야 하는 것이 아닌가.

만일 이 말이 참되다면 한 시대, 한 세대를 대표하는 작가가 이미 기득권을 가진 성 (性) 이나 계층을 위해 작품을 쓰는 것이 가하고 당한 일인지. 나는 어떤 작가의 작품이든 그것이 문학으로서가 아니라 세간의 편견과 오해에 의해 읽히는 것을 바라지 않는다.

지난 역사 속에서 생각이 다른 사람들을 매도하는 일에 우리는 충분히 상처받지 않았는가.

여러 사람이 우려하는대로 그의 담론이 상업주의적 '선택' 만은 아니었다고 굳게 믿는 나로서는 이제라도 어른스럽지 못한 비난이 중지되고 건강한 논자들에 의한 진지한 논의가 계속되기를 기대할 따름이다.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