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에메랄드 궁전의 추억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45면

참으로 오랜만에, 오후에 나는 명동으로 외출했다.

하지만 나른한 오후이니 전화를 해달라던 하영의 패션숍을 찾아가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녀에게 줄 생일선물을 준비하기 위해 모처럼 나들이를 한 것이었다.

그녀와 사귀어 온 지난 삼년, 우연하게 명동에 들를 일이 생겨도 나는 단 한번도 '유하영 부티크' 로 들어가 본 적이 없었다.

특별한 이유가 있어서가 아니라 그저, 그러는 것이 왠지 부자연스럽게 느껴져서 그런 것이었다.

무엇이 좋을까. 그녀의 생일 선물을 고르기 위해 나는 한동안 이 블록 저 블록을 돌아다니며 즐비한 쇼 윈도를 들여다보았다.

그러다가 악기사 앞에서 걸음을 멈추고, 목걸이 형으로 만들어진 앙증맞은 오카리나를 발견하곤 별다른 망설임 없이 그것을 생일 선물로 선택했다.

"이건 저도 하나 가지고 있는데, 너무너무 맘에 들어요. 한번 불어 보실래요?" 목걸이 형으로 만들어지긴 했지만, 계산대의 아가씨가 일러주는 대로 작은 구멍을 손가락으로 막고 불어보니 맑고 선연한 장조 음계가 정확하게 밀려나왔다.

그러자 1980년대 후반이었던가 1990년대 초반이었던가, 아무튼 맑고 신비로운 선율을 내는 그 피리소리에 한동안 심취했던 기억이 묵연하게 뇌리를 스쳐갔다.

가뭇없는 인생의 지문처럼, 문득 듣게 된 선율에서 우러나는 깊고 가슴 저린 추억의 파장 같은것. 선물을 사고 나서 좀 더 명동에 머무를까, 아니면 하영에게 전화를 할까, 그런 걸 망설이다가 나는 보이지 않는 기류에 떠밀리듯 다소 우울한 심정으로 그곳을 빠져나왔다.

내가 명동에 처음 발을 들여놓던 1970년에 중반의 카랑카랑하던 햇살, 그리고 에메랄드 궁전으로 홀연히 사라져버린 한 여인에 대한 아픈 기억을 곱씹으며 그곳을 배회하던 1970년대 후반의 나른하던 햇살이 기억에서 아프게 되살아나는 것 같아서 였다.

첫사랑 때문에 첫발을 딛게 되었던 명동, 그곳을 무슨 기연으로 나는 여적 맴돌고 있는 것일까. "내가 남긴 메시지 들었나요?" 집으로 돌아와 채 십분도 지나지 않았을 때 하영에게서 전화가 걸려왔다.

"응, 들었어. " "근데, 왜 전화하지 않았어요? 오후에 잡혀 있던 중요한 약속까지 취소하고 내내 전화를 기다렸는데…. " 메시지를 듣고도 자신에게 전화하지 않았다는게 다소 어이가 없다는 어조로 그녀는 되물었다.

"특별한 이유는 없어. 그리고 외출했다가 좀 전에 돌아왔거든. "

<박상우.소설가>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