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에톡쏘기>4. 풀은 시들고, 꽃은 진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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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6면

대초원 저편의 동물들이 조그만 점처럼 바라보였을 때 그들은 비로소 자신들이 참 많이 무리들을 떠나 걸어왔다는 것을 알았다. 작은 돌맹이처럼 바라보이는 것은 코끼리일 것이고, 막대기처럼 솟아올라 있는 것은 기린일 것이다. 언제든 죽음의 길로 들어설 때가 오면 그들은 함께 떠나기로 약속을 했었다. 그것은 초원을 떠나 스스로 사막으로 사라져 버리기로 한 약속이었다. 그리고 오늘, 때가 왔다는 것을 안 코끼리가 앞장을 서면서 그들은 천천히 무리를 떠나 걷기 시작했다. 대초원의 한가운데를 가로질러 오면서, 사라져 가는 자는 소리없이 떠나야 한다고 코끼리는 생각했었다. 자신의 발 아래 놀던 것들이 이제 자신을 본 채도 하지 않는 때가 온다는 걸 그는 이미 알고 있었다. '거대하게 살았으니까 사라질 때도 거대하게 가야 하는 거란다. ' 언젠가 할아버지가 지평선 저편으로 떠나면서 들려주었던 말을 코끼리는 잊지 않았다. 앞서 가던 사자가 몸을 돌려 코끼리를 바라보았다. 발 밑에 무엇이 있어서 코끼리가 또 저렇게 서 있는 거라고 사자는 생각했다. 작은 것을 밟지 않기 위해 코끼리가 얼마나 조심하는가를 사자는 알고 있었다. 그것이 큰 자의 도리였다. 코끼리가 다가왔다. 원숭이와 함께 그들은 다시 걸음을 옮겼다. "내가 오래 묻고 싶었던 것이 있는데, 사자 자네는 왜 잠을 잘 때도 눈을 뜬 채 자는가. " "그거야 그렇지. 우리는 눈을 뜨고 자지, 그렇다면 자고 있을 때 사자가 제일 잘 본다는 걸 자네는 모르고 있었겠군. " 권력이 그렇다는 걸 사자는 말해주고 싶었다. 힘은 있으되 그 힘을 쓰지 않아야 한다. 권력이 칼을 휘두르지 않을 때, 그때가 사실은 권력이 가장 힘을 발휘하는 때라는 걸 그는 오랜 초원의 세월 속에서 알고 있었다. 눈 뜨고 제 먹을 것을 찾아 날뛰는 것들이 언제 무슨 힘이 있었던가. 거의 끝나가는 초원 저 편 한 그루의 나무가 바라보였다. 초원을 지나면 사막이었다. 이제 그들은 거기서 길고 긴 잠을, 다시는 깨어나지 않을 잠에 빠져들어야 했다. 그들은 하얗게 뼈가 되고, 그 뼈마저 바람에 날리는 가루가 되기를 기다려야 했다. 앞에 펼쳐져 있는 사막을 그들은 바라보았다. 사자가 묵묵히 말했다. "저 사막도 언젠가는 숲이었지. 바다였던 곳도 있었어. 그래서 사람들은 뽕나무 밭이 변해서 푸른 바다가 된다는 말을 만들어 냈지만 그게 엄연한 사실이라는 걸 몰라. 권력만이 무상한 것이 아니라네. 모든 살아 있는 것들의 삶이 다 그렇지. 스러져 가는 것이 있고 스러져 가고 나면 그 자리에서 다시 소생하는 것이 있다네. 지금 천하를 얻겠다고 으르렁거리는 저 무리들을 보게나. " 사자는 뒤를 돌아보지 않고 곧장 걷기 시작했다. 사자가 먼저 사막으로 들어섰다. 코끼리는 느리게 뒤를 따라갔다. 늙은 원숭이는 숨을 할딱거리면서 막막하게 사막을 바라보았다. '저 속으로 들어가서 말라 죽느니 차라리 초원으로 되돌아 갈까 봐. 원숭이가 팔자가 뭐 별거겠어. ' 사자와 코끼리의 모습이 또 하나의 점처럼 작아지는 것을 지켜보면서 원숭이는 얼굴의 땀을 닦으며 오래오래 서 있었다.

한수산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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