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에서>아흔살 할머니의 사위 사랑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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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3면

얼마 전 외할머니께서 오셨다.그런데 며칠 전부터 외할머니는 밖에 나갔다 한참 지나서야 집에 돌아오시곤 했다.그냥 답답하니까 집주변을 돌아다니는 것이 아닌가 하면서도 외할머니의 빈번한 외출에 궁금증이 일어났다.

그러던 중 어머니가 외할머니께 하는 말을 우연히 듣고서 외할머니 외출의 숨겨진 속내를 알 수 있게 됐다.

“자꾸 이런 것 사오지 마세요. 송서방이 알면 걱정해요.”“비싸지 않아서 조금 사 왔어.”“그래도 자꾸 돈 쓰지 마시고 그냥 잘 가지고 계세요.”“내가 좋아서 하는 것이니까 괜찮아.” 외할머니는 생신 날 여기 저기서 받은 용돈으로 자식이나 손주를 위해 먹을 것을 사 가지고 와 냉장고에 가득 채우는 것이었다.어머니는 이런 외할머니의 모습을 보고 그렇게 하지 말라고 당부했지만 할머니는 자꾸 둘러대기만 하실 뿐 그러지 않겠다는 말은 하지 않으셨다. 잠시 후 가게에서 올라온 아버지는“장모님께서 사 오신 맥주는 안 마실래요”라고 말했다.

“아니,누가 맥주를 사왔다고 그래.나는 아니야.” 나는 방에서 책을 보다가 문 밖에서 들리는 대화 내용을 듣고 슬며시 웃음이 나왔다.두 분의 말씀 모두 거짓말이었다.할머니는 조금 전에 사위가 더운 여름에 시원한 맥주를 잘 마시는 것을 보고 냉장고의 맥주가 떨어질까 봐 걱정하시고 가게에 맥주를 배달시켰던 것이다.

아흔 살의 장모님이 계단을 오르락내리락 하면서 사위와 딸이 좋아하는 맥주와 야채,그리고 손자.손녀를 위해 과자와 사탕을 사오는 넉넉한 사랑을 누가 잴 수 있을까.환갑이 다 된 사위는'할아버지'소리를 듣고 있지만 장모님 앞에서 눈치를 보면서 무슨 불편한 점이 없는가 세심하게 신경쓰는 모습이 정말 아름답게 느껴졌다.

송원근<대학원생.충북청주시흥덕구수곡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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