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리의 흉물’ 전봇대 놔둔 채 국제행사 치르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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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0면

대구시 수성동 수성시장 옆 도로 변에 전봇대가 늘어서 도시 미관을 해치고 있다. 이곳은 2011년 세계육상선수권대회 마라톤 코스 중 한 구간이다. [대구=프리랜서 공정식]

대구시 수성동 수성시장 옆 도로. 상동네거리로 이어지는 왕복 6차로 도로변에 전봇대가 일렬로 늘어서 있다. 전봇대의 8∼10m 높이에는 전선이, 그 아래에는 광케이블 등 통신선이 거미줄처럼 얽혀 있다. 사람 눈높이에 맞춰 전단이 덕지덕지 붙어 있다. 이곳은 2011년 9월 열리는 세계육상선수권대회 마라톤 코스의 한 구간이다. 마라톤 경기가 펼쳐지면 각국 보도진의 카메라가 이 도로에 집중된다. 공중에서도 헬기가 선수를 따라가며 중계방송을 할 예정이다. 어지럽게 널린 전선과 전봇대의 모습이 세계의 시청자들에게 그대로 전달될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주민 김현수(44)씨는 “흉물스러운 전봇대가 대구의 이미지를 흐리게 할 것 같아 걱정된다”고 말했다.

대구시는 이런 문제점을 알고 올해부터 2010년까지 전봇대를 없애고 전선을 땅속에 묻기로 결정했다. ‘배전선로 지중화(地中化)’사업이다. 전봇대 철거 구간은 수성구 신매교∼담티고개와 대구은행 본점∼상동네거리∼수성유원지∼수성네거리 등 모두 13.1㎞. 전체 마라톤 코스의 31%에 해당한다. 대구시는 이 구간의 전봇대 260개를 철거하고 전선을 땅속에 묻는 데 2년이 걸릴 것으로 보고 있다. 올 상반기에는 착공해야 행사 전에 끝낼 수 있다. 시는 예산 사정을 들어 공사비 453억원 전부를 한국전력이 부담해줄 것을 요청했다.

하지만 사업이 벽에 부닥쳤다. 한전이 긴축경영을 이유로 올해 배전선로 지중화사업을 전면 중단했기 때문이다. 한전은 지난해 3조원에 이르는 사상 최대의 적자를 기록했다. 한전 이중호(43) 배전기획처 차장은 “올해도 대규모 적자가 예상돼 지중화사업을 중단할 수밖에 없다”며 “경영 여건이 호전돼야 사업을 재개할 수 있을 것”이라고 밝혔다.


2012년 세계박람회(엑스포)를 준비 중인 전남 여수시도 사정은 비슷하다. 여수시는 세계박람회장으로 통하는 간선도로(54.7㎞ 구간)의 전봇대를 2011년 말까지 철거해 달라고 지난해 11월 한전에 요청했다. 사업비 660억원 중 절반을 여수시가 부담하겠다는 의사도 밝혔다. 그러나 이 사업 역시 무기한 보류됐다. 장세길 여수시 도심정비담당은 “국제행사를 치르기 위해 반드시 지중화가 필요하다. 이달 중 한전 본사를 방문해 다시 협조를 요청하겠다”고 말했다. 전덕채 대구시 도로과장은 “국가 이미지를 생각해 정부와 한전이 적극적으로 나서 달라”고 호소했다.

한전의 긴축경영으로 경기도 안양·평택·성남 등 전국 70여 개 지방자치단체가 신청한 올해 100여 건의 사업도 진척이 없다. 모두 도시 미관을 위한 공공디자인사업이다. 한전은 지난해 2700억원을 들여 전국 100여 곳에서 배전선로 지중화사업을 벌였다.

대구·여수=홍권삼·천창환 기자

◆배전선로 지중화=안정적으로 전력을 공급하기 위해 전봇대의 전선을 도로 옆 지하 공간에 매설하는 것을 말한다. 태풍 등 자연재해로 전봇대의 전선이 자주 끊어지거나 도심에 고압 전류를 보낼 필요가 있을 때에는 한전이 자체 사업으로 결정, 공사비 전액을 부담한다. 지자체가 도시 미관 등을 이유로 지중화를 요청하면 심사를 거쳐 사업을 하기도 한다. 이 경우 한전과 지자체가 공사비를 절반씩 부담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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