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록&論>음반의 겉과 속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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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4면

시인이 한권의 시집을 상재하는 것은 단지 여기저기에 발표했던 시편들을 한자리에 모으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한편의 시가 세계에 대한 시인의 감성적 직관의 파편이라면 한권의 시집은 그파편의 날카로운 예지가 중층적으로 엮여 종합적인 울림을 연금해낸다.시집은 단순히 그 속을 채우고 있는 시편들의 산술적 종합이 아닌 것이다.
대중음악에서 앨범과 싱글의 관계는 시집과 시의 관계와 같다.
10곡 내외가 담겨 있는 앨범은 그저 곡들의 꾸러미가 아니라 한명의 음악가가 창조적 여정의 한 굽이에서 자신의 음악적 스타일과 세계에 대한 철학적 태도를 표명하는 한 단위 다.이윤동기와 명성에 대한 욕망이 동행하는 대중음악계의 이전투구 속에서 그와 같은 예술가의 강령을 실현하는 사람에 대해 수용자와 비평은.아티스트'의 영예를 부여하는 것이다.
우리의 대중음악이 상업적인 성격과 예술적인 성격을 조화롭게 발전시키지 못한 결정적인 이유중의 하나로 앨범과 싱글문화의 부재를 지적할 수 있다.한장의 음반에 한곡에서 서너곡을 담은 싱글이야 거의 찾아볼 수 없다손 치더라도 지금 이 순간에도 발매되고 있는 음반들은 앨범이 아닌가 하고 반문하는 이도 있겠다.
그러나 극소수의 음반을 제외하면 거개의 우리 대중음악 음반은앨범의 외양을 빌린,내용적으로 왜곡된 싱글음반이라 해도 과언이아니다.흔히 타이틀곡이라고 이르는 홍보용 노래 한곡을 정점에 올려놓고 나머지 트랙은 유행적 경향을 동어반복 하는 것으로 채우는데 급급하다.게다가 93~94 시즌부터 불붙은 리메이크 선풍이 이제는 일반화돼 재창조와 재해석이 결여된 단순한 치기에 불과한.원곡 훼손'을 불사하고 있는 실정이다.
이와같은 상황은 한마디로 국가적인 낭비다.음반산업은 음반산업대로 날로 높아지는 손익분기점을 맞추기 위해 무리한 매니지먼트와 합리적이지 않은 계약시스템을 운용해야 하며(왜 매니저와 음악인 간의 전근대적인 불협화음이 끊이질 않는가), 재능있는 신인들은 그들대로 자신의 능력을 펼칠 기회를 잃고 만다.
하지만 정작 최대의 피해자는 음반을 사는 수용자들이다.한두곡의.히트곡'을 위해 3~4배의 비용을 투자해야 한다.히트곡만을모은 거리의 불법테이프가 판을 치는데는 수용자의 암묵적인 불만이 내재해 있다.
1960년 33과 3분의1회전의 LP시대가 개막하면서 싱글문화는 일거에 사라졌다.우리보다 훨씬 큰 서구의 음반시장이 이 두 문화를 공존시킨데 반해 유독 한국만 LP를 고집한 것은 이땅의 음반산업에서는 마케팅 비용이 중심적이었다는 사실을 간접적으로 증명하는 것이다.
이제라도 구태를 벗을 때다.신인은 적은 비용으로 자신의 능력을 검증받고,중견은 힘든 앨범작업의 전조등으로 싱글을 활용해야한다.한국 최고의 록밴드.넥스트'가 곧 싱글음반을 발표한다는 소식은 그래서 반갑다.
(대중음악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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