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네에세이>'自尊과 굴복'의 게임 법칙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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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42면

사회에 첫발을 내디딘 개인에게 세상은 엄청나게 크고 무섭다.
조직.인맥과 터부로 가득찬 그것은 포세이돈이 지배하는 바다처럼신화적인 힘을 행사한다.
조금만 바보같이 굴면 조직의 쓴맛을 보여준다.연약한 우리는 오디세우스처럼 용기와 간지(奸智)를 발휘해 적당히 웃고 적당히튕기면서 이 험한 바다를 건넌다.
그래서 고향적인 세계,우리가 스스로 알고 스스로를 사랑할 수있는 그곳에 도달하기를 꿈꾼다.
그런데 언제나 자존심이 문제가 된다.우리는,왜 나는 잘났다고생각하지 않고는 한시도 살 수 없는 것일까.사회는 게임의 법칙을 내장하고 있어 그것을 따르지 않는 자에게 복수한다.나만은 그럴 수 없다는 자의식을 어루만지다 보면 우리는 어느새 한참이나 잘못 들어와 있다.이젠 어떻게 할 것인가.나는 누구이고 어디서부터 새로 시작해야 하는가.스파이크 리 감독의.걸 식스'는이같은 기로에 선 젊은 여성의 이야기다.
젊고 매력적이지만 가난한 흑인여성 주디는 꿈에도 그리던 영화오디션을 받으러 갔다가 가슴을 보여달라는 감독의 요구를 듣는다.화가 나 항의하지만 감독은“샤론 스톤도 그런 식으로 토를 달지 않았다”며 묵살한다.분기탱천한 주디는 감독의 오디션을 거부함은 물론 매니저와도 결별한다.
그 뒤 이 줏대있고 자존심 강한 여성은 생계를 위해 폰섹스를시작한다.
그 일은 다른 모든 직업과 마찬가지로 좋은 점도 있고 나쁜 점도 있다.
지루하고 짜증나고 단조롭기도 하다.단지 직업이었던 것이다.그러나 현실에선 그토록 반듯했던 주디는 전화라는 가상의 공간에서완전히 새롭게 변모한다.육감적인 목소리만으로 남성의 성적욕구를충족시켜 주는 그 직업에서 뜻밖에도 숨겨진 적 성을 발견한 것이다.주디는.6번 아가씨(걸 식스)'가 돼 폰섹스 숍에서 최고의 인기를 누린다.
아,잘못 살고 있구나.아예 집전화를 이용해 재택근무까지 하며스스로 폰섹스를 즐기는 자신을 깨닫고 주디는 아연해진다.그토록닭살 돋던 사회의 논리,여성을 남성의 욕망을 반영하는 거울로 취급하는 남성중심사회의 상품논리에 철저히 젖어 버린 자신을 보는 것이다.
우리의 꿈은 모두 똑같다.우리는 남들로부터 사랑받기를 원하고자기자신을 사랑할 수 있게 되기를 원한다.그러나.자존'과 .굴복'은 교묘하게 얽혀있고.기회'는 늘.위기'속에 있어 우리를 절망케 한다.이 복잡한 게임의 법칙으로부터 우리 는 어떻게 모반(謀叛)을 이룰 것인가.우리는 언제나 고향에 가 닿게 될 것인가. 새출발을 다짐하며 할리우드로 떠나는 주디의 마지막 모습이 낯설지 않다.
(소설가.이화여대교수) 이인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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