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취재일기] 욕·쓰레기·악플…우리 사회의 문제들이 그대로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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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3호 12면

필자는 중앙SUNDAY 9월 28일자 35면 On Sunday 칼럼을 통해 ‘( )없는 날’을 공모했다. 그 결과 모두 25명의 독자가 참여했다. 복수 응답까지 포함해 접수된 ‘(
) 없는 날’은 총 48개. 두세 명씩 중복되는 답변이 있었다.

‘On Sunday’ ( ) 없는 날 공모해 보니

먼저 ‘욕(또는 욕설) 없는 날’을 제안한 이가 3명이었다. 이은영님은 “얼마 전 6~7세짜리 꼬마가 택시를 향해 ‘야, XXX야’ 하고 욕하는 것을 보고 그 아이를 멍하게 쳐다봤다”고 취지를 설명했다. ‘청수전’님은 “요즘 어린아이의 초롱초롱한 눈망울에서 거침없이 욕설이 튀어나오는 광경을 본 적이 있느냐”고 기자에게 물어왔다. “욕설은 말한 사람 스스로의 영혼도 파괴합니다. 우리 어른들의 책임이자 죄이지요.”

‘쓰레기(음식 쓰레기 포함) 없는 날’을 보낸 분도 3명이었다. “매일 넘쳐 나는 음식쓰레기를 줄여 보자”(조병주님), “환경오염의 심각성을 생각해 나로부터 배출되는 음식·서류 등 쓰레기를 없애자”(김은경님)고 했다. ‘담배(담배 연기) 없는 날’은 2명 있었다. “고2 딸을 둔 엄마”라는 ‘Frau lee’님은 “딸 아이가 학교에 가면 아이들이 피우는 담배 냄새 때문에 너무 괴로워한다. 하루라도 비흡연자들이 간접흡연에서 벗어나게 하자”고 했다. 욕·쓰레기·담배…우리의 생활환경·정신환경을 말해 주고 있다.

자신의 삶 속에서 ‘( ) 없는 날’을 발굴해 낸 분도 적지 않았다. 한국외국어대 서경교(정치외교) 교수는 “졸업을 앞둔 제자들이 수십 군데, 심지어 100군데도 넘게 이력서를 제출하고도 조바심 내는 것을 보면 선생으로서 별 도움을 주지 못하는 것이 미안하기 짝이 없다”면서 ‘걱정·미움·불평 없는 날’을 권했다. “부정적인 마음에 갇혀 있기보다 각자의 마음에 희망과 소망을 채워 본다면….”

고등학교 2학년 ‘켄군’님과 중학교 3학년 이은경님은 “주변 친구들이 학원과 과외로 너무 피곤해한다” “학생들에게도 휴식이 필요하다”며 각각 ‘학원 없는 날’ ‘공부 없는 날’을 제시했다. 김숙경님도 “공부에 찌든 우리 아이가 마음껏 놀 수 있는 날을 만들었으면 좋겠다”면서 ‘가방 없는 날’을 보내왔다.

톡톡 튀는 아이디어도 눈길을 끈다. 김지원님은 “화장을 하지 않는다면 아침 변비도 예방하고, 외출 시 남편의 인내력 시험도 줄일 수 있다”며 ‘화장품 없는 날’을 제안했다. 이어 악플·잔소리·사장님·시계·넥타이·핑계·자살·이혼·어둠·반찬·주방세제·일회용품·외국어·할일·차별·지갑·나 같은 명사들이 ‘( ) 없는 날’의 빈칸 속으로 들어왔다.

칼럼에서 약속한 대로 이 중 하나를 선정해 상품권을 보내려니까 여간 힘든 일이 아니었다. 고심 끝에 수상작은 박현희님의 ‘왼손 없는 날’로 정했다. “큰 혼란 없이 장애의 수고로움을 체험할 수 있지 않겠느냐”는 취지다. 왼손잡이는 ‘오른손 없는 날’로 하면 되지 않을까. 쉬운 일은 아니다. 오른손만으로 자판을 두드리며 이 취재일기를 써봤는데, 한 자 한 자가 불편의 연속이다. 여러분도 해 보시길.

잠깐-. 이 글을 본 선배 한 분이 “수상작 한 편은 야박하다. 한 분만 더 뽑자”고 제안했다. 선배의 의견에 따라 김숙경님의 ‘가방 없는 날’도 수상작으로 선정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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