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자와함께>"사랑,그 짓궂은..." 펴낸 시인 박용수씨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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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7면

시인이자 우리말 연구가인 박용수(朴容秀.63)씨는 태생적으로유쾌한 사람이다.17세에 장티푸스로 청력을 잃었지만 그의 입에서 힘겹게 터져나오는 얘기는 듣는 이의 얼굴에 한바탕 웃음꽃을피게 한다.
朴씨가 지난 삶을 되돌아보는 『사랑,그 짓궂은 이야기』(조합공동체 소나무刊)를 냈다.한글 애용론자답게 맛깔스런 단어와 구성진 문장 때문인지 책읽는 재미가 솔솔 풍긴다.육십 평생을 엮어내는 솜씨가 마치 가을밤에 사랑방의 불을 밝혔던 옛 과객을 다시 만난 느낌이다.朴씨와의 인터뷰는 준비한 질문지에 그가 대답하는 형식으로 진행됐다.
『사랑,그 짓궂은 이야기』는 단순한 재담이 아니다.유년시절 추억부터 최근 상황까지 사담(私談)을 풀어놓지만 그의 관심은 어려웠던 우리 현대사에 집중된다.일제시대의 폭압,해방 직후의 좌우대립,유신체제와 80년대 군사정권에 저항했던 문단 주변의 일화가 꼬리를 물며 이어진다.
『민족분단으로 우리 민족이 겪은 고통을 재미있게 엮었어요.길손의 발목을 잡는 약장수처럼 멀지 않은 우리의 과거를 다시 한번 돌아보자는 뜻이지요.』 여기서 그는 제목에서 드러나듯 「사랑」에 특별한 무게를 싣는다.그가 말하는 사랑은 무엇보다 이웃,나아가 겨레에 대한 사랑이다.특히 36세의 늦은 나이에 중앙문단 진출을 위해 무작정 상경,이후 여러 사람들과 관계를 맺으면서 70~8 0년대 어려운 현실을 함께 헤쳐나갔던 자유실천문인협의회.민주통일민중운동연합의 뒤안을 소상히 전달한다.
『사회갈등을 푸는 해법(解法)은 역시 사랑입니다.공동선을 위해 자신의 목숨도 던지는 희생정신을 뜻하지요.시대는 달라졌지만이들의 노력이 결국 오늘을 만들지 않았을까요.이웃집에 강도가 들어도 모른 체하는 최근의 세태는 바로 사랑의 위기를 뜻합니다.』 그래서인지 사랑책에 연애담이 빠져 아쉽다는 질문에 『그게사랑의 전부는 아니야』라며 손사래를 쳤다.
이처럼 민주화운동에 자극받은 朴씨의 이웃사랑은 우리말 갈고 닦기로 직결된다.89년과 93년에 각각 나온 『우리말 갈래사전』과 『겨레말 갈래 큰 사전』은 바로 이런 사랑의 결실이었다.
사람.생활.자연.동물.산업.빛깔등의 주제별로 토박 이말 8만2천여개를 분류,높은 관심을 모았었다.
『겨레는 언어공동체입니다.말을 잃으면 겨레도 없어져요.띄어쓰기도 모르는 「대졸문맹자」가 얼마나 많습니까.이달초 남북한 학자들이 중국에서 모여 남북한 맞춤법을 현수준에서 동결키로 합의한 소식은 일단 하나라도 뜻을 모아 너무나 반가웠 습니다.』 그의 우리말 다듬기는 다음달말 또다른 열매를 맺는다.갈래사전에이어 『겨레말 용례사전』을 내놓는 것.갈래사전에서 찾은 토박이말의 쓰임새를 일일이 보여줄 작정이다.또 갈래사전의 분류를 네다섯 단계로 세분,12권으로 새롭게 엮을 계획 도 있다.그래서요즘에는 90년 서울 종로 한구석에 마련한 한글문화연구회 사무실을 24시간 지키며 올해 입문한 컴퓨터와 씨름하고 있다.
박정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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