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영배칼럼>세계시민으로의 도약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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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6면

세계인의 축구제전 2002년 월드컵대회가 한국과 일본에서 동시에 열리게 되었다.21세기 벽두(劈頭)에 국민이 지향할 명백한 목표가 생겼다는 점은 국가적으로도 참으로 다행한 일이다.그동안 정치 지도자들의 비전 부재(不在)로 인해 뚜 렷한 방향의식을 갖지 못한 우리에게 하나의 지표 역할을 할 것이기 때문이다. 돌이켜 보면 우리에게 88올림픽은 하나의 전기였다.6.25전쟁의 나라,갑자기 급성장한 졸부(猝富)의 나라 등으로 여겨지다가 세계인의 이목이 집중된 가운데 올림픽 역사상 가장 성공적으로 기록되는 대회를 치름으로써 일약 선진권에 진입 가능한 국가로 인정받게 되었다.
참가 규모에서,경기수.관람객수 등에서 사상 최대의 대회를 치르면서도 능률적인 경기운영과 절제된 시민행동으로 세계 각국의 선수들,관람객들,취재진에 깊은 인상을 심어주었다.88이후 외국에 나간 사람들이면 으레 「올림픽을 치른 나라의 국민」이라는 이름으로 불린 경험을 가졌을 것이다.
그런 올림픽이 끝난 후 우리들은 갑자기 흔들렸다.올림픽의 눈부신 성과는 그때 국회에서 막 시작되었던 5공청문회라는 한달 남짓한 기간을 거치면서 몽땅 사라졌다.정부는 올림픽의 공식노래『손에 손잡고』를 각종 행사.전화.방송등을 통해 계속 틀어댔지만 과거청산과 정치민주화의 열기 속에 파묻히고 말았다.
그러나 그보다 더 컸던 것은 올림픽 시민정신의 상실이었을 것이다.갑자기 자신감을 가진 우리는 마치 그동안 올림픽을 위해 모든 것을 참아왔던 사람들처럼 과소비에 젖어들고,흥청망청대고,질서의식을 버렸다.
선진국이란게 별것 아니더라는듯 외국을 무리지어 다니면서 눈살찌푸려지는 일들을 저질렀다.「추한 한국인」이란 오명도 나돌았다.외국으로부터 『샴페인을 너무 일찍 터뜨렸다』는 조롱을 받은 것이 바로 그 무렵이었다.근검절약과 엄청난 노동 시간으로 쌓아올렸던 경제가 흔들릴 정도였다.
이제 우리는 다시 한번 기회를 잡은 셈이다.더군다나 월드컵은파급효과가 더 크다고 할 수 있다.수억의 인구가 시청할 열띤 경기를 통해 한국의 위상은 재평가될 것이다.그로 인한 경제의 부수효과는 새로운 성장의 발판이 될 수도 있다.
남북문제에도 영향을 줄 수 있다.평양이나 북한의 다른 도시에서도 경기를 가질 수 있도록 하는 남북 분산개최 문제가 진지하게 논의되어야 한다.이런 문제들이 지금과 같은 대북(對北) 견제의 논리에서가 아니라 민족문제를 공동해결한다는 차원에서 접근한다면 그동안 정치가 이루지 못한 성과를 얻을 수도 있을 것이다. 가장 중요한 것은 이 기회에 우리 국민들이 세계시민으로서의 의식을 확립해야 한다는 것이다.일본과의 공동개최로 모든 것이 일본과 비교되게 되었다.가장 질서를 잘 지키는 국민,가장 깨끗한 거리,그리고 세계에서 가장 돈많은 나라와 경쟁 하는 부담은 적지 않다.
아마도 우리 국민들은 축구에서만은 일본에 져서는 안된다고 생각하듯 월드컵에서도 일본에 지지 않으려고 무섭게 노력할 것이다.정부가 요구하는 웬만한 희생도 감내할 것이다.승용차를 홀짝제로 운행하라면 그렇게 할 것이고,거리를 깨끗하게 청소하자면 그렇게 할 것이다.경기를 보러 온 외국인에게 친절해야 한다면 친절하게 할 것이다.올림픽처럼 서울 한 곳에서 열리는 것이 아니라 여러 도시에서 열릴 것이므로 전국민의 협조가 필요하다면 우리 국민들은 그렇게 할 것이 틀림없다 .
일본에 대한 시각도 단순한 경쟁차원에서가 아니라 보다 대승적(大乘的)협력으로 폭을 넓히는 계기가 돼야 한다.식민시대의 감정의 찌꺼기,경제적 실속을 챙기는 일본의 장사꾼적 속셈은 대범하게 보아넘기고 세계적인 대회를 공동으로 성공시키 는 동반자로서 「경쟁적 협력」관계라는 인식도 가져야 한다.
따라서 우리의 가장 큰 과제는 국민적 열기와 참여의 정신을 결집해 국민적 통합의식을 아울러내고 다시 그것을 세계시민의식으로 한단계 승화시키는 것이 되어야 할 것이다.
(편집국장대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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