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제작기행>"화면위의 인생" 셰리 터클 지음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19면

「컴퓨터(computer)」란 원래 「계산기」라는 뜻이다.파스칼(1623~1662)이래 추구돼온 계산기는 근대과학의 기계론적.확정론적.환원주의적 정신을 상징해온 개념이다.그런데 1948년 최초의 전자계산기 에니악(ENIAC)이 나 타난 후 컴퓨터의 발전은 「계산기」의 개념을 넘어 인류사회를 엄청난 변화속으로 이끌어가고 있다.이제 컴퓨터는 인간에게 조종받기만 하는한낱 기계가 아니라 하나의 거대하고 강력한 실존으로 인간 앞에자리잡고 있다.
퍼스널 컴퓨터가 70년대 처음 소개될 때까지만 해도 컴퓨터는기계의 자리에 머물러 있었다.컴퓨터를 만지는 사람은 「과학적」인 사람으로 인식됐고,사실 당시 컴퓨터를 조작하기 위해서는 최소한 컴퓨터 언어는 이해하고 있어야 했다.기계구 조까지는 아니라도 작동원리는 투철하게 이해해야 컴퓨터를 쓸 수 있었다.
80년대를 지나면서 변화가 일어났다.매킨토시와 윈도 작동시스템은 사용자에게 아무런 공부도 요구하지 않는다.이런 작동시스템이 표준화된 후 컴퓨터는 대부분의 사용자들에게 기계가 아닌 친구가 됐다.컴퓨터 사용은 이제 심각한 과학적 작업 보다 일상적인 놀이와 사회활동으로 번져나가고 있다.
셰리 터클의 『화면 위의 인생』(원제:Life on the Screen,Simon & Schuster刊)은 이 현상을 사회심리학의 시각에서 다룬 책이다.70년대 초부터 컴퓨터와 사귀기 시작한 저자는 80년대 초부터 컴퓨터의 변모를 추적하기 시작해 기왕의 저서 『제2의 자아』에서 컴퓨터가 인간의 사고에 끼치는 영향을 탐구한 바 있다.이번 책은 컴퓨터의 영향이 이제인간의 정서에까지 미치고 있다는 사실을 중심으로 컴퓨터가 주도할 시대의 변화를 내다보는 것이다.
터클은 컴퓨터 성격변화의 고비가 「투명성」의 상실에 있다고 본다.사용자가 작동원리를 투명하게 이해하는 한 컴퓨터는 하나의기계다.그러나 84년 출시된 매킨토시 컴퓨터는 사용자가 기계를뜯어보지도 못하게 돼 있다.프로그래밍 내용도 보통 노력이 아니면 들여다볼 수 없게 돼 있다.사용자는 화면에 나타나는 손쉬운안내만 따라다닐 뿐,컴퓨터는 뱃속을 보여주지 않는 하나의 독립된 존재로 사용자 앞에 자리잡게 됐다.
투명성을 버린 컴퓨터는 사용자에게 관계의 대상으로 다가서기 시작했다.화면 위에만 머물러 있게 된 사용자는 과학적 형식논리보다 시행착오의 연속적 과정을 통해 새로운 사고와 영역을 「유람」하는 자세를 키우게 됐다.심지어 과학분야의 연 구에서조차 선형적 접근방법보다 시뮬레이션을 통해 폭넓은 가능성을 검토하는방법이 득세해왔다.컴퓨터의 중심기능이 계산에서 시뮬레이션으로 옮겨진 것이다.
「유일불변의 진리」를 가정하는 것이 근대 과학정신의 핵심이다.이 명제가 컴퓨터의 변신으로 흔들리고 있다.컴퓨터의 시뮬레이션은 수없이 많은 가상현실을 만들어준다.이 가상현실이 처음에는유희의 대상으로만 여겨졌다.그러나 사람들의 컴퓨 터 경험이 축적됨에 따라 다른 생각이 통하기 시작하고 있다.컴퓨터를 일상적으로 쓰는 사람들 중에는 현실과 가상현실의 차이를 인정하지 않는 경향이 늘어나고 있는 것이다.
90년대 들어 컴퓨터통신이 유행하면서 개인의 정체성 문제가 가상과 실제 사이의 갈등을 심각하게 제기하고 있다.제한된 표현방법으로 이뤄지는 통신관계에 나타나는 사람의 모습은 실생활의 모습과 크게 다를 수 있다.심지어 인터네트에서 인 기를 끌고 있는 머드(Multi-User Domains)게임 같은 경우는참여자가 가상인물을 만들어 역할연기를 시키는 것이 아예 기본틀이다.머드게임을 즐기는 사람들은 여러 게임에 서로 다른 인격을출연시키는 것이 보통이다.
터클은 이것을 인격의 다중성이 자연스럽게 펼쳐지는 것으로 보고 탈근대(post-modern)현상의 일환으로 설명한다.개인의 인격을 고정된 실체로 보는 것이 근대세계의 표준이었고 다중인격은 병리적 현상으로 인식됐다.그러나 터클은 다 중성이 산업사회의 인간,특히 정보사회의 인간에게는 당연한 속성이며 그 다중성이 연속성을 가지지 못하고 파편화할 경우만을 병리적 현상이라고 본다.따라서 이 다중성을 드러내 경험할 기회를 주는 컴퓨터통신은 인격의 유동성을 늘려줌으로써 정신건강에 유리한 편이라는 의견이다.
계산문화에서 시뮬레이션문화로의 이행,이것이 컴퓨터가 인류사회에 가져오고 있는 변화의 핵심이라고 터클은 짚어낸다.그리고 이것이 바로 근대정신에서의 출구라고 설명한다.임의적.즉흥적인 행동양식과 다원적.유동적인 세계관, 자아관의 앞길을 컴퓨터와 컴퓨터통신이 열어주고 있다는 것이다.
컴퓨터문화에 대한 터클의 시각은 꽤 호의적이다.오락의 중독성과 통신상의 폭력성등 부정적으로 알려져 있는 측면들에 대해서도전체 변화의 자연스러운 일부로 받아들이게 해준다.피상적인 문제를 넘어 정보화사회의 더 깊은 문제로 눈길을 옮 겨주는 책이다. 셰리 터클(1948~)은 하버드대에서 사회학과 심리학으로 학위를 받은후 76년 이래 MIT의 과학사회학 교수로 재직중이다.70년대 프랑스 학계의 프로이트 수용을 다룬 『정신분석의 정치학:프로이트의 프랑스혁명과 자크 라캉』(1978 ), 컴퓨터를 통한 가치관과 인식방법의 변화를 다룬 『제2의 자아:컴퓨터와 인간의 정신』(1985)등의 저서를 통해 현대인의 정신적.사회적 변화를 추적해 오고 있다.
김기협 사학자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