맥도날드 부활 뒤엔 '눈물의 빵' 숨어있죠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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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04면

“폴로 티셔츠에 선글라스를 낀, 강남 멋쟁이란 멋쟁이들은 죄다 몰려왔지요. 매장 앞 횡단보도까지 줄이 늘어서고, 직원들은 ‘햄버거 10개 이상 안 팔아요’하고 외쳐댔어요.”

한국맥도날드 박종범(44·사진) 영업이사는 1988년 3월 맥도날드 매장이 처음 문 열던 날을 이렇게 떠올렸다. 그는 87년 말 아르바이트생으로 입사해 지금은 사라진 1호점 압구정 매장 오픈을 준비했던 창립 멤버다. 올해 20주년을 맞은 한국맥도날드의 유일한 20년 근속자이기도 하다. 20년 동안 하루도 빼놓지 않고 하루 한 끼를 맥도날드 햄버거로 채운 사람이다. 4년제 대학을 졸업했는데 패스트푸드점 아르바이트생으로 입사했다? 경제상황이 좋을 때라 의아해할 만하지만 당시엔 맥도날드가 선망의 대상이었다고 한다. 그는 “해외 문화에 대한 동경이 대단했던 때였다. 유니폼을 입으면 어깨가 으쓱했다”고 술회했다. 그 역시 항상 골든아치(M 모양의 맥도날드 로고)가 큼지막하게 새겨진 티셔츠를 입고 다니며 스스로를 대견스러워했다. 즐겁게 일하다 보니 4개월 만에 정직원이 됐고, 입사 3년 만에 종로2가 점장이 됐다.

세계화의 상징 맥도날드의 위상이 흔들리기 시작한 건 90년대 중반. 패스트푸드점이 우후죽순처럼 생기고 외식업체들도 다양해진 시기였다. 그러자 햄버거·감자튀김이 ‘정크 푸드’(싸구려 음식) 취급을 받기 시작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2002년엔 반미 시위의 표적이 됐다. 시위대는 한국맥도날드 본사가 있는 서울 인사동 관훈매장 앞에서 반미 구호를 외쳤다. 2004년엔 30일 동안 맥도날드 햄버거를 먹으며 체중 증가량을 잰 다큐멘터리 영화 ‘수퍼사이즈미’가 국내에서도 화제가 됐다. “가슴이 찢어졌죠. 이탈하는 아르바이트생을 잡기 위해 화장실 청소를 도와주고, 술 마시며 고민 상담도 했습니다.” 그는 한참 어려울 때도 맥도날드를 떠나지 않았다. 실제로 그는 국내 외식업체의 스카우트 제의를 수차례 받았다.

그는 요즘 들어 다시 일할 맛이 난다고 말했다. 한국맥도날드가 2004년 이후 꾸준히 펼쳐온 이미지 개선작업 효과가 나타나고 있는 덕분이란 점을 이유로 들었다. 딱딱한 의자를 푹신한 소파로 바꾸고, ‘맥모닝’ 같은 직장인을 겨냥한 메뉴가 주효했다는 것이다. 2002년 이후 내리막길을 걷던 한국맥도날드의 매출은 2006년부터 매년 두 자릿수 증가세를 보이고 있다.

그는 “맥도날드를 색안경만 끼고 볼 게 아니다. 회사의 우수한 직원 교육 시스템 같은 점은 배워야 한다”고 주장했다. 특히 배경보다 실력을 중시하는 인재관은 한국 기업들이 본받아야 할 점이라고 했다. 전국 230개 한국맥도날드 매장의 점장 가운데 절반 이상은 박 이사처럼 아르바이트생으로 입사한 경우다. 또 세계 119개국 3만여 매장이 똑같은 품질과 청결도, 서비스를 유지하는 것도 맥도날드의 저력이라고 덧붙였다. 그는 “아내도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만났다”고 말했다.

임미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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