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행 ‘달러 가뭄’ 왜?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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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01면

은행 금고에 달러가 말라가고 있다. 급기야 시중은행 자금부장들이 이달 18일 정부에 지원을 요청했지만 묵살당했다. 은행들은 돈줄을 더 죌 태세다. 기업은행은 지난달 말 이후 신규 외화 대출을 중단했다. 달러가 들여오기 무섭게 풀려 나가 버리자 자금부에서 ‘브레이크’를 건 것이다. 지난달에는 한 달은 버틸 물량인 2억4000만 달러가 불과 며칠 새 소진되기도 했다.

기업은행 김교성 자금부장은 “환율이 급등하면서 수요가 몰린 탓”이라고 말했다. 단기 급등한 환율이 앞으로 내릴 것이라고 본 투기 수요가 가세해 그렇지 않아도 살얼음판이던 외화 자금시장이 더 충격을 받았다는 것이다. 상황이 더 악화될 경우 은행들이 기업에 필요한 외화자금을 제때 공급하지 못할 수도 있다는 우려가 나온다.

◇“악순환에 빠졌다”=다른 시중은행에서도 요즘 외화 대출을 받으려면 본점의 엄격한 심사를 통과해야 한다. 서브프라임 모기지 사태로 촉발된 달러 가뭄은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다. 하지만 점점 악순환으로 빠져들고 있다는 게 은행권의 설명이다. 중장기 자금 조달 창구가 막히자 단기 시장으로 몰리고, 이마저 어려워지자 다시 하루짜리 초단기 시장을 기웃거리는 상황이 벌어지고 있다는 것이다. 은행들이 앞다퉈 달러를 빌리러 나서자 외국 금융사들은 이자를 올렸다. 한 시중은행 관계자는 “너도나도 외화를 찾으니 ‘한국에 무슨 일 있느냐’며 꺼리는 기색을 보이기도 한다”고 말했다. 국제 금융시장의 경색도 풀리기는커녕 악화되고 있다. 최근에는 중국의 은행들까지 국내에 풀어놓은 자금을 회수하고 있다.

국책은행도 어려움을 겪기는 마찬가지다. 달러화 채권 발행은 사실상 중단됐다. 대신 엔화에 이어 스위스 프랑, 말레이시아 링깃, 멕시코 페소화로 눈을 돌리고 있다. 그래도 사정이 여의치 않다. 수출입은행은 23일 사무라이본드(엔화표시 채권) 발행 계획을 무기 연기했다. 당초 300억~500억 엔을 조달할 계획이었지만 금리가 치솟아 계획을 접은 것이다.

◇돈 줄 죄는 은행들=“아직 견딜 만하다”는 게 정부와 한국은행의 시각이다. 최중경 기획재정부 차관은 23일 “정부가 외환보유액을 풀어 지원하는 것은 도덕적 해이”라며 “은행들이 스스로 해결해야 한다”고 말했다. 한은에 따르면 국내 은행이 외화를 빌릴 때 얹어주는 가산금리는 이달 초 0.52%포인트까지 오르다 이후 0.42%포인트로 낮아졌다. 0.25%포인트였던 올 초에 비해 높긴 하지만 안정을 찾아가고 있다는 얘기다.

하지만 은행의 체감온도는 다르다.

시중은행 관계자는 “지난달 말보다 사정이 풀린 건 사실”이라면서도 “1개월물의 경우 0.6%포인트, 3개월물은 0.9%포인트까지 더 얹어주고 있다”고 말했다. 그는 “한은 자료는 금리가 낮은 하루짜리 초단기 자금을 빌리는 경우가 늘면서 생긴 착시일 것”이라고 덧붙였다.

은행들은 돈 줄을 더 죌 계획이다. 한은은 지난달 기존 대출을 받은 기업들에 1년간 만기 연장을 허용하겠다고 발표했다. 환율 급등으로 생긴 부담을 덜어주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현재 은행들은 ‘선별적’으로 연장해 준다는 입장이다. 일부를 먼저 갚아야 나머지를 연장해 준다는 조건을 내건 곳도 상당수다.

반면 외국계 은행들은 정반대의 상황이다. 서브프라임 모기지 사태의 피해를 덜 본 외국계 금융사의 경우 상대적으로 싸게 자금을 들여와 비싼 값에 운용할 수 있기 때문이다. 한 외국계 은행 관계자는 “외화 부문의 경우 올해 목표 수익의 70% 이상을 1분기에 이미 달성했다”고 말했다.

조민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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