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달아 높이곰 돋아사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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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3면

아랫목에 보료가 깔려 있는 것이 마음에 걸렸다.진분홍 모란꽃빛깔이다.위스키와 얼음,소다수와 함께 장어요리들이 날라져 왔다. 『한잔 하시겠습니까?』 고박사는 익숙한 솜씨로 유리잔에 얼음을 넣고 위스키를 따르며 물었다.
『위스키는 자신이 없어요.』 『그럼 와인이라도 시킬까요?』 『아니에요.아주 연하게 타서 주셔요.』 건배를 가볍게 했다.무엇을 위한 건배인가.고인에 대한 추도인가,아니면 격조했었다는 인사인가.고박사는 묵묵히 잔을 부딪치고 고개 숙였다.
『폐가 많았습니다.』 최교수에 대한 이야기 같았다.
『제 잘못이었어요.먼데까지 오시게 한 것이….』 『간 사람에대한 얘기 할 건 아니지만 성미가 격했어요.』 고박사가 변명하듯 하며 덧붙였다.
『용서하십시오.…세상 떠난 사람이니.』 남편과 최교수와의 일을 그는 알고 있는 눈치였다.어떻게 알았을까.남편이나 아버지가말했을 리는 없고 의사 특유의 예리한 감각과 판단으로 짚은 것일까. 『죄송합니다.부끄럽습니다.』 아리영은 고개를 떨구었다.
유리잔 속에서 얼음 두 덩이가 녹으며 작은 소리를 냈다.임신을위한 상담의사인 고박사는 직책상 아리영의 몸을 알고 있다.남녀관계를 통해서가 아니라 아리영 자신의 필요에 의해 몸을 내보인유일한 남자다 그 남자와 상담 아닌 일로 이렇게 마주앉아 있는것이 착잡했다.그것도 남편과 그의 여동생 일로….
또 하나의 치부(恥部)를 보인 수치심이 아리영을 주눅들게 했다. 『늦기 전에 모셔다 드려야겠군요.』 아리영의 상심을 짐작했는지 고박사는 식사를 서둘러 마치고 일어섰다.
운전석 옆에 앉아 아리영은 스스로 안전 벨트를 매며 나선생의뜨거운 손 생각을 했다.나선생과 고박사.이를 데 없이 예의 바르고 반뜻한 이 남자 둘이 아리영의 빈 가슴 안에 함께 자리잡고 있는 것이 묘했다.세련된 고박사와 소박한 나 선생.
나이만 비슷할 뿐 성격이나 생김새도 다르고 직업도 동떨어진 이 두 남자의 영상이 한 덩어리가 되어 아리영 가슴에서 어른거렸다.그 영상을 지우기라도 하듯 아리영은 며칠동안 서울집을 대청소했다.
방안 정리도 하고 유리창도 말끔히 닦았다.자귀나무 가지도 치고 마당의 잡초도 뽑았다.잔디도 밀고 대문가의 우편함을 닦고 있는데 마침 소포 한 꾸러미와 사진엽서 한 장이 배달됐다.나선생이 일본서 부친 것이다.
어느새 일본에 간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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