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로벌아이] ‘티베트의 봄’ 오려면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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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0면

입사 초년병 시절인 1989년 국제부에 배치됐다. 당시 담당 지역은 중남미·아프리카였다. 매일처럼 펼쳐지는 비극의 드라마, 그 배후엔 어김없이 미국과 옛 소련 등 강대국이 있었다. 국익을 위해 약소국을 부품처럼 취급하는 제국의 논리는 가슴 섬찟한 현실이었다.

이듬해 8월 이라크가 쿠웨이트를 침공했다. 운 좋게 한국 기자로는 처음 바그다드에 들어갈 수 있었다. 전쟁 지역에 투입됐으니 종군기자가 된 셈이다. 현지에서 본 미국의 중동정책은 철저한 이중기준 그 자체였다. 이스라엘과 중동에 적용되는 원칙은 흑백처럼 달랐다.

눈길을 현재로 돌려보자. 티베트 분리독립 시위에 대한 중국의 유혈 진압이 화제다. 티베트인들은 올림픽을 코앞에 둔 시점에 봉기를 일으켜 티베트 문제를 세계적 화두로 부각시키는 데 성공했다. 티베트 시위를 중국이 유혈 진압했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서방은 즉각 대응했다. 찰스 영국 왕세자가 개막식 불참을 선언했다. 하베르나르 쿠슈네르 프랑스 외무장관이 개막식 불참 가능성을 시사한 데 이어 니콜라 사르코지 대통령도 “개막식 보이콧을 비롯한 모든 가능성을 열어두고 있다”고 압박했다. 앙겔라 메르켈 독일 총리도 개막식 불참 가능성을 내비쳤다. 낸시 펠로시 미국 하원의장은 인도 다람살라로 날아가 달라이 라마를 만났다. 체첸 문제에 발이 묶인 러시아와 ‘혈맹국’을 주장해온 북한만 중국에 대한 지지를 표시했다.

많은 국가가 중국의 유혈 진압을 비난하는 배경에는 ‘티베트는 티베트인들의 땅’이라는 인식이 깔려 있는 듯하다. 남의 땅을 강압적으로 점령한 주제에 폭력까지 행사하는 것은 좌시할 수 없다는 기분이 읽힌다. 사실 맞는 얘기다. 1720년 청(淸) 강희(康熙) 황제의 군대 파견 이래 티베트가 줄곧 중국의 영토였다는 것은 역사적인 사실이다. 식민지 노하우가 풍부한 서방 국가들이 이 사실을 모를 리 없다.

문제는 청말의 혼란에서 비롯됐다. 인도를 삼킨 영국이 청조의 약화를 틈타 티베트 장악에 나섰다. 1888년과 1903년 영국은 티베트에 출병했다. 그 결과 영국은 티베트에서의 배타적 특권을 인정받는 대신 중국의 티베트 지배는 인정했다. 1947년 인도 독립을 계기로 티베트의 실질적 지배권은 영국에서 인도로 넘어갔다.

중국은 공산 중국 성립 직후인 1951년 라싸를 다시 무력 점령한다. 대신 인도가 갖고 있던 특권은 그대로 인정했다. 그해 달라이 라마가 인도를 망명지로 선택한 것은 우연이 아니다. 인도와 티베트는 정서적으로 한 식구 같은 사이다. 곧이어 옛 소련이 티베트인들에 대한 회유에 나선다. 티베트를 남진정책의 발판으로 삼기 위한 시도다. 이때부터 중국은 티베트를 ‘소수민족 문제’가 아닌 ‘국가 안보’의 차원에서 바라보게 됐다. 중국이 티베트 문제에 필사적으로 매달리는 이유다. ‘티베트 독립=중국의 분열’로 판단하기 때문이다. 올림픽을 잃을지언정 티베트를 내놓을 중국이 아니다.

이런 상황에서 중국에 무턱대고 압력만 가한다면 사태만 악화시킬 뿐이다. 티베트에 대한 통제는 더욱 죄어질 것이다. 서방의 제국주의 침략사를 거론하면서 경제 보복 등 역공에 나선다면 세계 경제가 경색될 수도 있다. 물론 티베트가 독립을 되찾을 가능성은 전무에 가깝다.

그렇다면 결론은 간단하다. 중국의 불안을 씻어줘야 한다. 티베트에 대한 중국의 실질적인 지배권을 인정하고, 티베트와 올림픽을 연계시키는 행위도 하지 말아야 한다. 대신, 티베트의 실질적이고 광범위한 자치를 티베트 지배권 인정에 대한 조건으로 내걸 수 있다. 분열에 대한 두려움이 사라진다면, 중국은 훨씬 부드럽고 탄력적으로 변할 것이다. ‘티베트의 봄’은 그제야 가능하다. 현실을 직시한 처방전이 필요한 때다.

진세근 베이징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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