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이훈범시시각각

청백리가 되라는 게 아니라 …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지면보기

종합 30면

지난주 중앙일보 경제섹션에 재래시장 르포가 실렸다. 감자 한 개, 콩나물 200원어치를 우겨 사야 하는 서민들의 애옥살이가 절절한 시장통 풍경을 그린 기사였다. 뛰는 물가에 홀쭉한 주머니를 더욱 여미니 가뜩이나 힘든 재래시장 매출이 지난해의 절반도 안 돼 매물로 나온 점포가 줄을 섰다는 얘기였다.

주말엔 1면에 재산공개 기사가 실렸다. 입법·행정·사법부 고위 공직자 2182명 중 절반이 지난 한 해 동안 재산을 1억원 이상 늘렸다는 거였다. 열 명 중 하나는 5억원도 넘게 불렸다. 부동산 투자의 달인도 있었고 주식 투자의 귀재도 있었다. 그림과 보석, 골프장 회원권… 높은 분들의 재산증식 포트폴리오는 다양하기도 했다.

두 기사의 인과관계를 따지는 건 우습다. 재래시장이 어려운 걸 공직자 재산 탓으로 돌릴 수도 없고, 공직자들이 모두 청백리 된다고 서민 살림이 핀다는 보장도 없는 까닭이다. 늘었다는 재산도 상당수 공시지가가 오른 탓이니 실감도 못하는 공연한 숫자놀음이 더 많을 터다. 그래도 뭔가 얹힌 것처럼 속이 편치 못하다. 잠시 과거로 거슬러 가보자. 세종대왕 때다.

우의정 유관은 어찌나 가난했던지 비만 오면 지붕에서 물이 새 방에서도 우산을 써야 했다. 그러면서도 “우산도 없는 집은 어찌 견딜꼬” 걱정을 했다. “남 걱정 말고 우리 살 궁리나 하라”는 아내의 핀잔에도 그저 껄껄 웃을 뿐이었다. 그는 조선조 500년 동안 열여섯 명밖에 안 되는 청백리 재상으로 뽑히는 영광을 누렸다.

영의정 유정현은 품성이 인색하고 욕심이 많아 백성들에게 고리로 돈을 놓았다. 제 날짜에 갚지 못하면 하인을 보내 가마솥까지 빼앗아 왔다. 뒷산에 열린 과일까지 죄 시장에 내다 팔아 작은 이익까지 계산함으로써 쌓아둔 곡식이 7만 석이 넘는 부자가 됐다. 어찌나 지독했는지 “백성들이 ‘비록 죽을망정 영의정 돈은 꿔 쓰지 않겠다’ 원망했다”고 실록은 전한다.

유정현은 구차하게 재물을 모았다 해서 말년에 다시 좌의정에 임용될 때 요즘 말로 인사청문회에 해당하는 ‘서경(署經)’을 통과하지 못했다. 하지만 세종은 임명을 강행했다. 삼군도통사로서 대마도를 정벌하고 오랫동안 호조를 맡아 나라 곳간을 잘 지킨 공로를 인정한 것이었다.

한 사람은 재물을 너무 하찮게 여겼고 또 한 사람은 지나치게 중시했지만 두 사람 모두 훌륭한 재상이었다. 같은 임금을 받들어 성군으로 만들었다. 이제 얹힌 속을 풀 시간이다. 고위 공직자라면 과연 자신이 이들 두 재상 사이 어디쯤 위치하는지 한번쯤 생각해볼 것을 권하고 싶다. 어느 한쪽에 치우쳐 있다면 스스로 중심을 잡으려고 노력한다면 좋지 않겠나 말이다.

유관 쪽에 서야 칭찬을 받는다고 생각할지 모르겠다. 대부분 반대쪽에 서서 말이다. 하지만 한비자의 말은 다르니 안심하시라. 수레를 버리고 말을 굶기던 진(晋)나라 재상 맹헌백을 비웃던 얘기 말이다. “굶는 백성이 있는데 어찌 말을 먹일 것이며, 걷는 노인이 있는데 어찌 수레를 탈 것인가”라는 게 맹의 철학이었다. 하지만 한비자는 다른 이의 입을 빌려 꾸짖는다. “재상에게 말 두 필과 수레 두 대를 내리는 건 나라에 변고가 생겼을 때 빨리 대처하기 위함이지 사치하라는 게 아니다. 그런데 나랏일을 무시하고 자신의 명예만 빛내고 있으니 어찌 칭찬하겠는가.”

그렇다고 한비자가 나랏일 무시하고 자기 재산만 불리고 있는 사람까지 두둔하는 게 아닌 건 잘 알 터다. 스스로 머슴을 자임한 우리 대통령은 공직자들에게도 머슴이 될 것을 요구한다. 대통령의 머슴론을 한비자식으로 풀면 비 오는 날 집에서 우산 쓰고 있으라는 얘기가 아니다. 자기 재산 줄어들까 걱정하듯 콩나물값 깎는 국민들 살림살이도 걱정하란 얘기다. 내 주머니 불릴 포트폴리오 궁리하듯 국민들 가계부 살찌울 궁리도 좀 하란 말이다. 그렇게만 한다면 1억이고 2억이고 공직자 재산 늘어나는 걸 온 국민이 함께 축하해줄 수 있지 않겠나 이 말이다.

이훈범 정치부문 차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