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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이오의 역설’을 아십니까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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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4면

얼마 전 ‘가이오의 말이 과연 맞더라’는 조사 결과가 나왔습니다. 미국에서 가족 수와 인종·교육수준·종교 등 조건이 모두 같은 두 가정의 수입을 비교했더니 연간 100달러를 더 기부한 가정이 375달러를 더 벌게 되더랍니다. 열 배는 몰라도 뿌린 돈의 서너 배는 되돌아온 셈입니다. 돈이 많아야 기부한다고들 하나 역으로 기부를 많이 할수록 돈이 굴러들어 오기도 한다는 겁니다.

하지만 사실 돈보다 더 큰 것, 돈 주고도 절대 못 살 것을 얻게 되는 게 기부의 마력입니다. 저 역시 그 힘에 홀린 지 여러 해째입니다. 큰돈은 아니지만 다달이 2만원씩 국제 구호단체인 월드비전을 통해 방글라데시와 모잠비크에 사는 여덟 살 동갑내기 소년·소녀에게 보내주고 있습니다. 처음엔 겨우 2만원으로 무슨 일을 하겠나 싶었는데 그게 아니었습니다. 우선 그 돈으로 염소를 키워 1년 내내 아이와 가족들이 영양가 풍부한 염소 젖을 먹는답니다. 책과 학용품을 사 아이가 학교에 다니고, 아플 땐 병원에도 갑니다. 저 같은 후원자들의 돈을 모아 마을에 우물을 파 깨끗한 물을 마실 수도 있답니다. 그래선지 날이 갈수록 키가 쑥쑥 자라고 훤칠하게 인물이 나는 두 아이의 사진을 볼 때마다 저는 ‘2만원의 기적’을 실감하곤 합니다.

통신비·관리비·카드대금… 월급 통장을 갉아먹는 미운 항목들 중에 ‘월드비전’이란 이름으로 빠져나가는 4만원은 결코 아깝지 않은 돈입니다. 누군가는 ‘밥벌이의 지겨움’을 말했지만 저는 꼬박꼬박 월급 주는 회사가 있어 적게나마 나눌 수 있는 처지인 게 고맙습니다. 스트레스와 피로에 짜증이 나다가도 이 일로 제 딸을 기르고 아이 둘을 더 보살핀다 생각하면 없던 기운이 쑥쑥 솟습니다. 자양강장제가 따로 없습니다.

핀잔 들을 각오하고 별 자랑거리도 아닌 얘길 털어놓는 이유는 주는 것보다 얻는 게 더 많은, 이 마술 같은 기부 행렬이 좀 더 길어지길 바라기 때문입니다. 마음이 없어서가 아니라 길을 몰라 못하는 사람도 분명 있을 테니까요. 기부 많이 하기로 유명한 미국 사람들은 지난해 3000억 달러에 가까운 돈을 내놨습니다. 국내총생산(GDP)의 1.7%나 됩니다. 국민 한 명당 92만원꼴이지요. 우리나라는? 정확한 통계는 없지만 GDP의 0.05%쯤 될 거라 추산한답니다. ‘선진국 클럽’인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회원국, 세계 13위의 경제대국이란 명함을 내밀기 남부끄러운 수준입니다.

‘곳간에서 인심 난다’던데 아직 우리 곳간이 남 퍼줄 만큼 가득 차진 않아서일까요. 하지만 곳간 차기만 기다리다간 부지하세월일 겝니다. 그러니 속는 셈치고 ‘가이오의 역설’을 믿어 보면 어떻겠습니까. 그도 아니면 제 강장제 타령에 한번 넘어가 보시던가요.

크리스마스 시즌입니다. ‘기부 천국’ 미국에선 11~12월이면 기부 건수가 평소보다 40~50배나 많아진답니다. 한데 우리나라에선 고아원·양로원에 불던 연말연시 ‘반짝 경기’마저 썰렁하다는 소식입니다. 흥청망청 술잔치에 백화점들 배만 불리는 쇼핑 열풍을 보면서 크리스마스가 남의 나라 일 같기만 할 우리 아이들, 크리스마스가 뭔지조차 모를 먼 나라 아이들을 떠올려 봅니다. 맨 정신으로 한 해를 넘어가기는 왠지 헛헛한 당신, 올해 성탄절엔 나누는 기쁨에 흠뻑 취해 보지 않으시렵니까.

신예리 국제부문 차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