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중앙시평

몸의 숭배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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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5면

아름다움을 위해 성형에 매료되는 현상을 어떻게 봐야 할까. 부모에게 물려받은 몸은 피부와 머리카락까지도 소중히 하라는 전통 윤리의 관점에서 보면 성형만큼 개탄스러운 일도 없을 것이다. 그러나 굳이 전통적 도덕률을 들추지 않더라도 단지 아름답게 보이겠다는 바람으로 자신의 육신에 칼질을 마다하지 않는 대담함에 대해서는 공감보다 거부감을 느끼는 사람이 더 많지 않을까 싶다.

성형의 문제는 물론 개인보다 사회의 차원에서 접근할 수도 있다. 그럴 경우 성형의 대중화는 매스미디어와 상업주의 소비문화가 지배하는 현대사회의 병리현상으로 비판의 대상이 된다. 즉 오늘날 대중소비사회에서는 TV·인터넷·잡지 등 대중매체가 미모의 규범을 정하고 이를 상품화함으로써 아름다움이란 마치 원하면 손에 넣을 수 있는 것인 양 환상을 조장한다는 것이다.

성형의 대중화를 이처럼 아름다움에 대한 허황된 욕망이나 상업주의 대중매체가 빚은 병리 현상으로 개탄하고 비판하는 것은 모두 공감할 만하지만 전적으로 수긍하기는 어렵다. 엄밀히 말해 미용 성형을 비정상적·병리적인 것으로 규정할 미학적 근거는 없다. 어떤 기준에서 구순열(口脣裂) 성형은 옹호하고 쌍꺼풀 성형은 비난해야 하며, 화장이나 두발 염색은 용인하나 지방 흡입이나 유방 확대 성형은 배척해야 할까. 지나침 혹은 적절함이란 모호한 기준에 따라 정도의 차이는 있을지언정 아름다움을 추구한다는 점에서 이들은 본질적으로 모두 동일하다고 할 것이다.

성형은 몸에 대한 현대인의 의식과 태도를 보여주는 한 단면에 불과하다. 현대사회의 특징 가운데 하나는 사람들이 자신의 몸에 대해 지극한 관심과 정성을 쏟는 것이다. ‘몸의 숭배’라 일컫는 이 현상이 구체적으로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쉽게 알 수 있다. 웰빙·다이어트·피트니스·조깅 등의 용어가 일상어로 정착한 현실은 오늘날 사람들이 건강하고 아름다운 몸에 어떤 가치를 부여하는지 잘 보여준다.

몸을 숭배하는 바탕에는 몸에 대한 인식의 변화가 있다. 몸은 더 이상 자연적으로 주어지고 운명처럼 순응해야 할 것이 아니라 원하는 대로 선택하고 바꿀 수 있는 것이라는 인식이 그것이다. 말하자면 몸은 계획하고 수행해야 할 하나의 ‘프로젝트’가 된 것이다. 사람들은 이 프로젝트를 위해 시간과 노력을 아끼지 않을 뿐 아니라 배고픔처럼 참기 어려운 고통과 거식증처럼 죽음에 이를 수 있는 위험마저 기꺼이 감수한다. 잘생긴 외모가 사랑·결혼·직업을 둘러싼 경쟁에서 성공을 약속한다고 믿기 때문이다.

몸의 숭배현상은 세속화와 개인주의라는 근대 이후 역사 발전의 귀결이라 할 수 있다. 세속화와 개인주의는 종교와 공동체적 삶의 영역이 줄어들고 이에 따라 사람들의 삶에 의미를 제공하는 초개인적 질서와 가치체계가 점차 사라짐을 뜻한다. 그런 맥락에서 보면 몸의 숭배는 공동체적 관계가 해체되면서 원자화되는 인간이 자신의 몸에서 자기 존재의 의미를 찾는 현상이다. 결국 몸의 숭배현상이란 몸이 자아 정체성의 핵심 요소가 되고, 자아를 표현하고 연출하는 수단이 되는 것을 의미한다. 그리하여 개인주의가 발전할수록 몸을 통한 자기 연출은 더욱더 극단화하는 경향을 띤다. 성형·피어싱·문신의 유행은 외양을 치장하는 화장이나 옷이 아니라 그야말로 ‘맨몸’이 자기 표현의 수단이 되고 있음을 보여준다.

몸의 숭배는 매우 염려스러운 현상이다. 그것은 생물학적 존재로서 인간의 몸이란 유한하다는 사실을 간과하고 있다. 사실 소멸이라는, 몸의 필연적 한계를 숙고한다면 몸을 숭배의 대상으로 삼기는 어려울 것이다. 그래서 몸에 대한 숭배가 더할수록 죽음에 대한 두려움은 더 커지게 된다. 현대사회에서 죽음이 일상의 삶에서는 감당할 수 없는 것으로 철저히 격리되고 배제되는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닌 것이다. 죽음이 인간 존재의 본질적 조건이라면 죽음을 전망하지 않는 사회는 걱정스러운 것이 아닐 수 없다.

안병직 서울대 교수·서양사 <베를린 자유대학 체류 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