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거기 그녀가 서있는걸 보았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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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4면

3.실종 ○39 제물구 선생의 「100분 1학기 물리 총정리」는 그런대로 들을만 했다.내가 알아듣지 못할 부분들도 많았지만 새로 이해하게 된 것들도 많았다.어쩌면 물리라는 게 그렇게어려운 건 아닌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고,노는 시간에 왕박에 게 말했더니 왕박이 기뻐해주었다.
『그래,공부라는 거 막상 해보면 별 거 아니라니까.그런데 이걸 안해가지구 손해보는 애들은 얼마나 크게 밑지는 거냐 이거지.』 왕박은 수학을 더 들어야 한다고 해서 나는 혼자 학원을 빠져나왔다.빨리 집에 가서 저녁을 먹고 시간표대로 공부를 해야겠다고 생각했다.거리엔 아직 그림자가 길게 늘어져 있었다.신촌시장 쪽의 정거장을 향해서 걷는데 누군가 내 옆에서 나란히 걷고 있었다.하영이였다.그 애가 반짝 웃었다.나는 깜짝 놀라서 어떤 표정을 지어야 하는지 아직 결정하지 못하고 있었다.
『강의실에서 널 보구 설마 했었어.』 『응 그냥 한번 특강이라구 해서 와본 거야.등록한 건 아니라구.근데 너무 덥더라구 찜통이야.』 하영은 눈썹을 이마로 잔뜩 올리면서 아무 말도 안했다.하영은 내가 학원에 온 걸 쪽팔린다고 느끼게 만들어서는 안된다고 작정한 모양이었다.
그래서 내가 또 말했다.
『애들이 다 미쳤어.이 더운데 이렇게까지 기쓰고 남보다 공불더 잘 해보겠다고 그럴 거 없잖아.이건 과당경쟁이라구.결국 손해보는 건 다 우리들 자신이라니까.장사하는 사람들이 덤핑경쟁하다가 양쪽 다 망하는 거나 똑같아.방학이 뭐냐구 .학에서 방되는 게 방학이잖아.그치.방학 동안에는 서로 공부 안하기로 약속하구 다같이 놀면 되는 건데 말이야.이러니까 나라가 잘 될 리없지.그러니까 법으로 딱 정해야 한다니까.방학동안에 공부하는 자는 징역 3년 이런 식으로 말이야 .남들 자는 시간에 공부하는 거 이런 거 다 반칙으로 잡아넣어야 한다니까.』 하영인 여전히 애매한 표정을 하고 내 다음 말을 기다리고 있는 자세로 걷고 있었다.우리는 신촌시장 정거장을 지나쳤는데도 계속 걷고 있었다. 하영이가 어깨에 멘 가방을 한번 들썩이고 나서 불쑥 말했다. 『그래도 넌 강의를 아주 열심히 듣고 있던 걸.난 널…쭈욱 보고 있었거든.』 『그래,듣기야 들었지,들어도 몰라서 탈이었지만.』 『니가 그러는 거…얼마나 멋있어 보였는지 아니.
』 나는 어쩐지 쑥스러워서 가만히 있었다.하기야 이건 뭐 마치내가 무슨 못된 짓을 하다가 걸린 놈처럼 굴 이유야 없다고 나는 나를 달랬다.
하영이가 또 말했다.
『다른 이야길 해봐.그 써니라는 니 여자친구 말이야,우리 아빠한테 들었는데…아무래도 제 발로 집을 나간 거 같다고 그러던데….』 『이팔청춘인 아이들을 잔뜩 모아놓구 달 표면의 중력가속도를 말해서 어쩌자는 건지 모르겠어.그게 우리하고 무슨 관계가 있다는 거냐구.땀을 뻘뻘 흘려가면서 우리가 왜 그런 걸 듣고 앉아 있어야….』 『딴 소리 하지마.써닌 소식이 없냐니깐.
』 나는 걸음을 멈추고 하영이의 한쪽 팔을 잡아서 돌려 세웠다. 『제발 나한테 이러지 마.그 일은 나한테 에피소드가 아니란말이야.내 말 알아? 난 힘들다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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