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거기 그녀가 서 있는걸 보았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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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8면

『뭐라구…?』 나는 형의 말을 내가 잘못 들은 건가 하고 다시 되물었다.도대체가 믿을 수 없는 말이었다.하기로 한다면 형은 내게 표창장같은 걸 줘야 마땅했다.
『아버지에게 대든 건 니가 잘못한 거란 말이야.』 『이거 봐형,내가 아버지에게 그런게 물론 형을 위해서는 아니었지만….』거기까지 말하는데 나는 갑자기 형에게 아무 것도 더 말하고 싶지 않았다.나는 갑자기 외로워지는걸 느꼈기 때문이었다.『아니야,관두자구.하여간 난…형이 일방적으로 당 하기만 하는 거 보기싫다구.』 형은 더 말하지 않았다.
한가지 분명한 건,내가 아버지의 권위에 내놓고 항거한 일에 대해서 어머니나 형이 나에게 전혀 고마워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내게는 이해되지 않는 일이었지만.
그날 아버지가 나를 때리려고 했던 건 처음 있는 일이었다.형은 간혹 아버지에게 한대씩 얻어터지기도 하고 그랬지만 어쩐 일인지 내게는 아버지가 아주 관대했던 거였다.그건 아마 내 어린시절 동안 아버지가 주로 외국에 나가 계셨던 사실 하고 관계가있을 것이다.어머니는 내가 어려서부터 아버지와 같이 지내지 않아서 아버지를 어려워하지 않는다고 말씀하시곤 했다.
하지만 내 어린시절의 기억 속에도 아주 단편적인 아버지와의 추억이 있었다.다섯 살 아니면 여섯 살 즈음의 내가 아버지와 함께 어느 화려한 매장 한가운데에 손을 맞잡고 서 있었다.
게다가 아버지는 허리를 굽히고 내게 물어주셨다.
『자 말해봐.여기서 제일 갖고 싶은게 뭐니?』 모든 사람을 춤추게 만드는 요술 바이올린.마음씨 고운 거지소년이 바이올린을켜면 무서운 판사님도 두둥실 춤을 춘다.나는 악기점의 바이올린을 가리키며 아버지를 올려다보았다.
희미하게나마 기억나는건 그것 뿐이었다.그땐 아주 어렸었다.이건 아버지와 내가 손을 잡아본 유일한 기억이기도 했다.
사실 아버지가 실제로 바이올린을 사주었는지 어쨌는지는 기억에남아 있지 않다.오랜만에 잠깐 한국에 다니러온 아버지가 나를 백화점 같은데에 데리고 가서 무언가를 사주었을 거라고 생각해보는 게 전부였다.이건 내가 커가면서 어떤 막연한 장면을 사실로믿기 위해서 혼자 구체화시켜본 것에 지나지 않았다.나는 어머니나 누구에게도 그날의 일에 대해서 물어보지 않았다.내게 바이올린이 남아 있다는건 얼마나 중요한 일이었던가.그 바이올린은 마치 신데렐라에게 남은 구두 한짝 같은 거였다.
나는 간혹 장롱 위의 바이올린을 내려놓고 가만히 한참씩 들여다보고는 했다.먼지 쌓인 검정 케이스를 열어젖히면,거기엔 틀림없는 요술 바이올린이 그 신비로운 소리들을 품고 잠들어 있었다.보라색 융단의 한가운데에서 은은하고 깊은 토색빛 을 내뿜던 바이올린의 그 우아하고 정교한 생김새는 내게 묘한 두려움을 주고는 했다.
언젠가 한번은 아직 내가 국민학교에 들어가기 전이었다.형이 병원에 입원해 있었는데 어머니는 날이 어두워질 때까지 병원에서돌아오지 않았다.나는 텅빈 방에서 바이올린을 꺼내서 아무렇게나활을 놀렸다.그러자 끼익끼익 괴상한 소리가 났 고 나는 무서워져서 혼자 울고 있었다.
나는 아버지를 춤추게 만들고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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