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거기 그녀가 서 있는걸 보았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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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9면

정학이 끝나는 토요일이었다.
『특과 생활도 끝나버렸네….』 교문을 빠져나오면서 승규가 투덜거렸다.아무도 그말에 대꾸하지 않았다.우리 네 악동들은 어쩐지 맨숭맨숭한 분위기가 돼서 타박타박 신촌 네거리 쪽으로 걸어나오고 있었다.승규도 말은 그렇게 했지만 정작 기도실 생활이 그리워서 그러는 건 아닐 거였다.
『야 저게 말이 되니.난 저런 거 보면 구역질이 난다구.』 상원이가 느닷없이 신경질적으로 그랬다.상원이의 시선을 따라가보니까 연대 입구의 어느 근사한 식당 입구에 걸린 현수막을 보고그러는 거였다.「가정의 달을 축하드립니다」라고 쓴 큰 글씨 아래쪽에 작은 글씨로「가족단위 예약 대환영」이라 고 돼 있었다.
『엄마하고 둘이 살면 그것도 가족이지 뭐냐 임마.거 괜히 그러지 마.』 영석이가 퉁명스럽게 그랬는데,그건 영석이가 재치있게 상원이를 달랜답시고 고도의 테크닉을 발휘한 거였다.상원이가홀어머니와 단둘이 살기 때문에 심통을 내는 거라고 생각한 모양이었다. 상원이가 짜증스러운 표정을 하고 다시 말했다.
『그런 뜻이 아니라 임마,저렇게 낯 간지로운 말을 어떻게 대문짝만하게 써붙일 수 있냔 말이야.도대체 누가 누구한테 축하하는 거냐구.…모르겠어.난 설명을 잘 못하겠는데…하여간 낯 두꺼운 놈들 아니냐구.』 『어른들이라는게 다 그렇지 뭐.넌 어른들끼리 인사하는 것두 못봤니.』 한동안 말이 없던 승규였다.
말하는데 다들 조금씩 괜한 신경질이 섞여 있었다.나는 승규가언젠가 했던 말이 생각나서 말했다.
『맞아,덕분에…그러는 사람들 역겨운 건 사실이야.전에 도깨비도 어떤 학부형한테 그러더라구.「그동안 안녕하셨어요」어떤 엄마가 그러니까 「덕분에요」그러는 거 있지.그동안 자길 안찾아왔다고 쫑크 먹이는 거라면 몰라두…어른들은 하여간 참 알아줘야 돼.아주 뻔뻔한 족속이라구.』 『그러니까 다음번에 헌법을 고칠 때는 그런 걸 분명히 해둬야 한다니까 그러네.덕분에요 어쩌구…그런 쓸데없는 소리 하는 사람들은 평생 격리수용을 시킨다든지 하여간 뭐 그런 거 있잖아.』 이럭저럭 버스 정류장이었다.우리는 어디로 가서 뭘 할건지 아직 정하지 않은 상태였다.중국집에가서 쫑파티라도 하는 게 어떠냐고 누가 그랬고,여의도 광장에 가서 자전거를 타면서 물을 살펴보는 게 어떠냐고 내가 그랬는데,어쩐지 보통 때처럼 적극적인 자세들이 아니었다.
『야 이리와서 좀 앉아봐.』 보도에 궁둥이를 붙이고 발은 차도에 내려놓은 자세로 승규가 소리쳤다.그래서 우리 넷은 북적이는 버스정류장 근처의 차도쪽 보도끝에 나란히 주저앉았다.승규가심각한 표정을 하고 있다가 입을 열었다.
『당분간 난 빠져야겠어.너희들 하고 같이 안다니겠다고 집에다단단히 약속을 했거든.』 『…그거야 사실 다 마찬가질 걸.』 『어쨌든…미안해.』 하기야 그런 말은 헤어지기 편한 버스정류장에서 나누는 게 어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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