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거기 그녀가 서 있는걸 보았네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29면

기도실에서의 아침은 도깨비에게 시달리는 것으로 시작했다.도깨비는 전날 우리가 제출한 시말서가 너무 짧고 엉터리라면서『오늘중으로 적어도 다섯장 이상의 분량으로』시말서를 다시 써내라고 호통을 치고 사라졌다.
도깨비에게 닦달당하는 것만 뺀다면 생활환경은 대체로 괜찮은 편이었다.기도실에 우리끼리 둘러앉아 낄낄거리다가 노는 시간이 되면 각자 자기반 교실에 가서 열심히 놀았다.그러다가 수업개시를 알리는 종이 울리면 당당하게 교실을 빠져나오는 거였다.그럴때면 교실에 남아 수업을 견뎌야 하는 녀석들은 우리의 뒷모습에선망의 시선을 보냈다.계집애들은 좀 달랐지만.
「노는 시간」말인데,그 시간을 선생님들은「쉬는 시간」이라고 말했다.관점의 차이라는게 바로 이런 거였다.왜냐 하면 우리 악동들은 수업시간을「쉬는 시간」이라고 불렀으니까.그래서 나는 언젠가 어른이 되면「우리가 배워야 할 것은 모두 노 는 시간에 배웠다」는 제목으로 책을 하나쯤 써봐야겠다고 생각했을 정도였다. 하지만 기도실에서의 둘쨋날은,어머니들이 학교에 불려와서 무슨 소리를 듣고 갈 것이며,그 여파로 각자가 집에서 겪을 수난의 강도가 어느 정도일까를 염려하는 썰렁한 분위기가 기도실을 장악하고 있었다.별말들이 없이 시말서 긁적이는 시늉 을 하고 있는게 못견디겠던지 간혹 영석이나 승규가 웃기기를 시도했지만 도통 호응도가 별로였다.
교장선생님과 도깨비는 아무 죄도 없는 엄마들을 야단칠 것이고그러면 힘없는 엄마들은 무조건 무슨 죽을 죄라도 지은 죄인같은표정을 하고 용서를 구할 거였다.우리 애는 원래 이런 애가 아니었는데 친구를 잘못 사귀더니 이렇게 돼버렸다 고,엄마들은 또서로 은근히 책임을 떠넘기다가 서로 좋지 않은 표정을 하고 돌아설 거였다.그리고 집에 와서는 그놈들과는 다시는 같이 놀지 않겠다고 맹세하기를 각자의 아들에게 강요할 것이었다.
그런 일들이 벌어질 걸 생각하는 건 우리 악동들에게도 참으로우울한 짓이었다.엄마들은 우리가 사고를 칠 때마다 매번 똑같이학교에 불려다녔으니까 이제는 서로 얼굴도 익히고 있는 터였다.
그러니 차라리 무슨 친목계같은 거라도 해서 서 로 사이좋게 지내시면 얼마나 좋을까 하고 나는 생각했다.
『야 이건 절대 비밀인데 말이야….』 영석이 큰누나의 결혼1주년 기념여행 이야기가 아니었다면 우리는 그날 내내 쫙 가라앉은 분위기를 벗어나지 못했을 것이다.
『우리 작은누나 친구들이 자기들끼리 이야기하는 걸 슬쩍 들었는데 말이야,우리 큰누나 있잖아,시집 가서 한 번 할 때마다 만원씩 받았대.…누구긴 누구야 매형한테 받았지 쪼다야.그걸 꼬박꼬박 알뜰하게 모아둔 걸 가지구 이번에 기념여행 을 간거다 이거야.』 『뭘 할 때마다 받은 건데…?』상원이가 한마디 했다가 병신이 돼버렸다.『어이구 이 답답한 놈아.』『넌 글쎄 언제나 철이 드니.』『머릴 써 머릴… 그 무거운 건 왜 달고 다녀이 멍청아.』 『야 근데 니네 큰누나 어디로 여행갔지? 돈이 얼마나 들까…?』 돈 계산이라면 딱 부러지는 승규였다.
『작은누나 친구들이 그러는데 한 2백만원은 들거래.일본으로 갔거든.』 『그럼 일년 동안에 도대체 몇번을 했다는 소리야….
』 『그거 돈받고 하는 건 법에 걸리잖아.』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