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구려는 살아있다] 고구려史 갈등 어떻게 풀어야 할까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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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1면

지난 17일 '중국변강사지(史地)연구중심'에 들러 책임자인 리성(聲) 주임에게서 그 기구의 성격과 연구 방향 등에 대해 들었다.

우리가 관심 갖는 동북공정은 신장 등 6개 연구 영역의 하나로서 이미 3년 동안 매년 2백50만위안씩 투입해 연구한 결과가 출간되기 시작했고, 지난해부터 동북공정에 참여한 필자 개인이 자신의 글에 책임지는 형태로 신문 등에 발표할 수 있게 되었다 한다. 논란의 불씨가 된 지난해 '광명일보' 6월 24일자 기사도 그런 정책 변화의 한 지표라 할 수 있다.

그는 한국에서 일어난 거센 반응에 놀랐다면서, 학술적인 차원에서의 논의라면 얼마든지 한국 측과 의견 교환할 용의가 있다고 말했다. '고대중국고구려역사속론'에 실린 기조논문에도 "학술규범과 국제관계에 부합하는 시각에서 정상적인 학술교류와 토론을 전개하겠다"는 구절이 있다.

그런데 같은 글에서 "조선반도 남북학계 연구 중의 비학술적 경향", 특히 남한의 '국수주의적 경향'을 지적한 데서 드러나듯이 고구려사 연구는 어디서나 현실 정치와 연관되기 쉽다. 중국 측도 예외가 아닌 것을 주임이 변강 연구를 통해 애국주의를 강화하려 한다고 말한 데서 알 수 있다. 연구 과제가 일단락될 2005년 또는 2006년에 변강 배치도를 만들어 대중 교육용으로 쓰겠다는 구상은 그 증거일 것이다.

중국 정부가 변강 연구를 장려하는 의도는 파악하기 어렵지 않다. 베이징(北京) 정부 입장에서 소수 민족의 상당수가 거주하는 방대한 국경 지대의 안정은 국가 통합에 필수적이다. 특히 급격한 현대화 과정에서 격차가 더 벌어지는 소수민족을 포용하는 일이 다급해졌고, 그를 위해 해당 지역에 대한 연구를 진행하게 된 것이다.

동북 지역의 경우 남북한 통일 과정이 미칠 영향도 고려되고 있다. 그런데 '국민국가의 옷을 걸친 제국'이란 말을 들을 수 있을 규모인 중국이 애국주의에 호소하는 국가 통합에 의존할 때 중국인의 문화역사구조 속에 자리잡은 대국심리는 이웃에게 현실적인 위협 요인으로 전화될 수 있다. 이 점에서 중국이 소수 민족의 이익과 국가이익의 조정을 꾀하는 다원적 정치시스템을 구축하고, 역사도 개방적으로 해석하는 역량을 보이기를 기대하게 된다.

그렇다면 우리의 대응은 어떠한가. 이제까지의 반응 가운데, '제2의 나당전쟁' 운운하면서 '역사전쟁'으로 보는 성급한 국수주의적 움직임이 두드러지지만, 오늘의 국경을 동아시아 고대사 영역에 소급해 적용하는 발상으로는 문제의 해결을 기대할 수 없다는 비판적 여론도 적지 않아 다행이다.

그 밖에 체계적인 고구려사 연구의 기반을 닦을 필요가 있다는 주장이 나왔고, '고구려연구센터'나 '동북고대사 연구소'등의 설립안이 구체적으로 제시되었다. 그러나 고구려사 연구 확대가 문제 해결의 핵심이라고는 보이 않는다.

새로운 발상으로의 전환 없는 대증 요법으로는 21세기에 창조적으로 대응할 수 없다. 지금 절실한 것은 국사와 동아시아사의 '화해'다. 그렇다고 성급하게 국사를 동아시아사 속에 해소해버리자는 것은 아니다. 동아시아 역사 속에서 형성.변형된 국가들(과거로부터 억압당한 주변적 존재들)의 궤적의 중층성을 총체적으로 파악하려는 자세를 가져야 진정한 화해의 역사가 쓰일 것이다. 이런 시각에서 볼 때, 전통시대 동아시아가 중국이란 중심질서 안에 여러 소중심질서들이 존재한 다원적 세계였음이 새롭게 드러난다. 스스로 '화(華)'로 자처하고 변방민족을 속민으로 삼은 고구려도 그 소중심의 하나였다.

이렇게 동아시아 지역을 하나의 단위로 파악하는 국사와 동아시아사의 화해 프로젝트는 21세기 동아시아의 미래사를 새롭게 쓰는 작업이기도 하다. 이를 위해서는 시민사회가 주도하되 정부의 협력을 얻는 방식을 취해야 한다. 필요하면 한.일, 한.중 역사공동위원회가 아닌, 좀더 포괄적인 동아시아역사위원회 같은 기구 구성에 우리가 앞장설 수도 있다.

물론 동아시아 내 각 시민사회 역량 역시 불균등해 이 과제를 수행하기가 쉽지 않은 듯보일 수 있다. 하지만 전 지구화 과정에서 국가 권력의 기능이 변화되고 있는 지금이야말로 이 기능 변화에서 허용된 틈새를 활용해 국가의 억압성을 약화시켜 민주적 개혁을 시도할 적절한 때다. 역사 교육의 국가 독점을 견제하고 다양한 주체가 그에 참여하도록 시도하는 것은 바로 민주적 개혁의 주요 고리가 아닌가. 시민사회의 역량이 비교적 강한 한국이 그런 변화를 추동하는 역할을 해낼 수 있을 것이다.

사실 중국의 동북 지역은 동아시아 국민국가 형성 과정에서 피동적 역할을 한 주변이자, 국경이 중첩되는 변경에 불과했다. 이제 그 주변이 주목받고 있다. 과연 개별 국사 간의 갈등으로 끝나지 않고, 국사와 동아시아사의 화해의 촉매가 될 것인가. 또 다른 '동북프로젝트(공정)'가 시작돼야 할 시점이다.

백영서 교수 연세대 중국근현대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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