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년 퇴임 앞두고 시 전집 낸 오세영 교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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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은 영 쑥스러운 표정이었다. 자꾸만 어색한 웃음을 지어 보였다.
 
“완전한 의미의 전집은 죽고 나서나 가능한 건데 어쩌다 보니 전집을 벌써 묶게 됐습니다. 엄밀히 말한다면 지금까지 낸 시를 모두 한 곳에 모은 ‘집합본’이란 말이 맞겠지요.”
 
오세영(65ㆍ사진) 시인이 올 1학기를 끝으로 서울대 국문과 교수를 정년 퇴임한다. 워낙 소탈한 성격인지라 조용히 넘어가려고 했단다. 그러나 제자들은, 남들처럼 스승의 정년 퇴임에 맞춰 논문 헌정집을 내야 한다고 고집을 부렸다.
 
결국 타협한 것이 시 전집이다. 1965년 등단한 이래 오세영 시인이 발표한 시집은 모두 17권. 그 안에 실렸던 1100여 편의 시를 모두 한 곳에 모았다. 제자들이 전집 편집을 위해 애썼다. 그렇게 하여 '오세영 시 전집'(전2권, 랜덤하우스)이 세상에 나왔다.
 
“학자와 시인으로 절반씩 살았습니다. 학문적 성과를 요구하는 대학과 문학적 결실을 바라는 문단의 중간에서 고민도 많았고 스트레스도 심했습니다. 이제부터는 좀 더 자유로워지겠지요. 우선은 전공 이외의 책들을 많이 읽을 생각입니다. 우리 역사를 노래한 장시(長詩)를 쓰고 싶은 욕심도 있고요.”
 
시인은 시류에 휘둘리지 않고 자신의 시 세계를 고집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 때문에 사실 오해도 적지 않았다. 세상이 어지러운데, 혼자만 순수시인인 체 한다고 말이다.
 
“시가 정치를 위해 희생된 시대가 있었습니다. 그때는 그래야 했습니다. 문학보다 인간의 삶이 더 중요하니까요. 그러나 그러한 시가 시의 본령이나 목표는 되지 못한다고 생각합니다. 사실 나도 현실을 노래한 시를 여러 편 썼습니다.”
 
이를 테면 ‘장미’나 ‘부끄러움’과 같은 시는 80년대의 시대적 상황을 시로 읊은 것이고 ‘김치’란 작품은 통일을 염원한 노래다. ‘평양냉면에/전라도 동치미를 곁들인다면/우리들의 가난한 식탁은 또 얼마나/풍성하겠니?’이 구절을 읊으며 시인은 다시 어색하게 웃었다.
 
26일 오후 6시 30분 서울 세종문화회관에서는 오세영 시인의 정년기념 출판기념회가 열렸다. 시인 김남조씨와 비평가 이어령씨가 축사를 했고, 직장 동료인 권영민 교수가 오 시인의 작품 세계를 설명했다. 300명 가까운 하객 앞에서, 시인은 예의 소박한 웃음을 짓고 겨우 “감사합니다”라고 말했다.
 
퇴임 후에는 미리 마련해둔 경기도 안성의 땅에서 나무 기르고 꽃 키우며 살고 싶다는 뜻도 전했다. 어느 날부터 들꽃이 좋아지게 된 건 흙이 될 날이 멀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시인은 일전에 쓴 시에 진작에 적어 두었다.
 

글=손민호 기자, 사진=조문규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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