빛과 그림자(분수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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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따르릉,따르릉. 깊은 잠속에서 수화기를 집어 든다. 『여보세요. 거기 강력계장님 댁이죠.』 『네,거기 어디세요.』『여기 당직인데요. 계장님좀 바꿔주세요.』 시계를 보니 새벽 3시. 1시 가까이 중요한 강력사건 수사현장을 돌아다니다 들어와 막 깊은 잠에 빠진 남편이 안쓰러웠지만 그러나 깨우지 않을 수 없다. 『여보,전화받아 보세요.』『에이 참,또 무슨사건이지.』 남편이 잠결에 수화기를 받아 든다. 『뭐,변사체라구. 알았어,나 현장으로 바로갈테니 그리 연락하시오.』 남편은 주섬주섬 옷을 챙겨 입고 나가 차에 시동을 걸기 시작했다.
쌀쌀한 새벽공기를 마시며 현장으로 달려가는 남편을 생각하니 그렇게 쏟아지던 잠도 확 달아나 버리고 말똥말똥 새 정신이 든다. 이럴땐 경찰관 아내의 마음은 찢어질듯 아파온다. 남 잠자는 시간에 잠 한번 실컷 잘 수 있나,남들처럼 공휴일에 나들이 한번 할 수 있나,그렇다고 사회에서 충분한 대우나 인정을 받는 것도 아니고…. 그러나 어쩌다 남편이 일찍 집에 들어오는 날이면 반가움보다 오히려 불안한 생각이 든다는게 경찰관 아내들의 한결같은 변이다.
21일은 경찰의 날. 서울경찰청은 이날을 맞아 처음으로 「경찰관가족 내조수기」를 공모,그 가운데서 입선작 36편을 뽑아 『무궁화,그 빛과 그림자』라는 책을 펴냈다. 최우수작은 최은희씨(35·교통안전과 교통민원 고발센터 신동엽경장의 부인)가 응모한 「앞좌석·뒷좌석」. 나이든 시부모를 모시면서도 자폐증과 신체·지능장애를 앓고 있는 네살바기,세살바기 두 아들의 치료비를 마련하기 위해 조그만 의류점을 경영하고 있다는 최씨는 이 수기에서 「두 아들의 장래가 염려돼 승용차를 탈때도 만약의 사고에 대비,부부가 운전석과 뒷좌석에 따로 앉는다」고 적고 있다.
이 수기 모음에는 이밖에도 학생시위를 막다 돌에 맞아 혼수상태에 빠진 남편을 돌보는 눈물겨운 간병기,순찰근무중 오토바이사고로 뇌를 다친 남편 뒷바라지로 온갖 고생을 다하는 부인의 글 등이 실려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눈시울을 뜨겁게 한다. 박봉과 과로에 시달리는 경찰관 부인들의 진솔한 삶을 담고 있는 이 수기를 대하면 경찰이란 「빛」보다 「그림자」가 더 많은 직업임을 알 수 있다.<손기상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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